'스무살 너희가 별이야' 386세대가 자녀에게 권해주고 싶은 이야기

<김경환 객원기자>
나는 386이라는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대신 ‘광주 세대’라 부르는데, 그만큼 광주 민중항쟁이 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의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어쩔 수 없이 386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 그 말이 알게 모르게 보편성을 얻은 까닭이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오늘은 나 자신 386세대로서 권하고 싶은 책이 하나 있어 이렇게 어눌한 말문을 열고 있다.

일상의 힘은 무섭다. 거센 파도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밀어 닥친다. 한때, 변화에 대한 열망과 치열한 열정을 가졌던 수많은 386들. 이들은 이제 현실이라 불리는 일상 속에서 ‘밥벌이’를 위해 지겨움과 불안, 팽팽한 긴장을 견디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탁월한 재능과 빛나는 창조성을 발휘하여 눈부신 성취를 이룬 이들도 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대개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묵묵히 생활을 밀어가고 있지 않을까.

나를 비롯한 386들은 사십을 훌쩍 넘어 이젠 중년 소리를 듣는다. 흰 머리도 늘고, 눈도 흐려졌다. 격한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무릎이 삐걱거리고, 폐활량에 자신이 없어진다. 그뿐인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분노도 잦아들었다. 스무 살 시절 지녔던 드높았던 이상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현실과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가치들이 어느 새 성큼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 출세와 성공과 타협 속에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평범한 3856의 공동 관심사는 아마 이런 것들이 아닐까. 내 집 마련, 노후 준비, 자녀 교육. 그 중에서도 가장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자녀 문제일 것이다. 아이들이 훌쩍 커서 벌써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간다. 입시를 경험해본 부모로서는 난감하고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병폐라 할 수 있는 입시 경쟁을,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피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러 대안교육 쪽으로 눈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다. 사교육, 더 나아가 해외유학이 내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중학교 3학년인 아이가 있다. 예전보다 더욱 치열해진 교육 환경 탓에 중학생 때부터 입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소재의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고등학교를 잘 가야 한다. 외고니 과학고니 하면서 이미 서열화가 시작된다. 정확한 통계는 알지 못하지만 학력 수준은 서울은 예전부터 지방을, 서울에서도 강남은 강북을 저만치 앞지르고 있다. 고등학생 아닌 중학생들 얘기다. 중학 2학년 때 이미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등급이 결정된다는 무서운 현실 앞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처음 아이가 생겼을 때, 공부하라 소리 안하고 자유롭게 키우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천진난만한 생각인가! 경쟁 위주의 가혹한 교육 현실은 그대로인데, 아니 더욱 심화되고 있는데 독야청청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발상이었다. 학원에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굳건한 신념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처절하게 무너졌다. 이미 네 살, 다섯 살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니, 피아노를 가르치니 하는 판에 주변의 성화를 견뎌낼 수 없었다. 자기  변명이라고, 비겁한 넋두리라 비난해도 할 수 없다.

나는 ‘독한 부모’가 되지 못했다. 철저한 교육관을 갖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를 고수하겠다는 신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치열한 경쟁에서 내 자식 살리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겠다는 철면피로 나갔어야 하는데 이러기엔 배짱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난 실패한 아비다.

어정쩡한 타협 속에 나는 그저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학원을 보내고, 과외공부를 시켰다. 할 수 있으면 더 잘하면 좋겠지만 그저 중간이나마 했으면 했고, 더 쳐지지 않도록 격려하고 야단을 쳤다. 그러면서 한 구석에 ‘이래도 되나’ 하는 찜찜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너 무슨 일 있어도 꼭 일등해야 한다, 경쟁에서 지면 낙오자가 되는 거야,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하지도 못했다. 하여간 참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방치했다고나 할까.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런 평범한 소시민이자 중학생을 둔 학부모로서 나는 얼마 전 한권을 책을 샀다. <스무 살, 너희가 별이야>(삼인)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는 성공하라, 출세하라고 말하는 세상을 보기 좋게 ‘엿 먹이는’ 여덟 사람의 삶과 생각이 담겨 있다. 한 편 한 편 읽다보면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르고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난다. 그런 한편 내면이 원하는 대로 용기 있게 살지 못한 지금 모습에 초라하고 부끄러워진다.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일까.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것일까. 나는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 아닐까. 아이가 일류대학을 들어가 평생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번듯한 자격증도 따고, 또 정의감 넘치는 아름다운 인간성도 갖기를 원하는 건 아닌가. 자식 가진 부모 심정이야 다 똑 같다 해도 그걸로 살짝 넘어가기에는 스스로의 속물 근성을 용납하지 못하지 않는가.

세상이 뭐라 해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서 충만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여덟 사람.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부모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잘 했다고 할까, 그러지 말라고 할까. 나는 우리 아이가 그들처럼 산다면 뭐라 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 당당한 아비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삶에 당당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아이가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적어도 어깨를 두들기며 활짝 웃어주고 싶다.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나는 잠자는 아이의 머리 맡에 슬그머니 이 책을 놓고 나왔다. '아이야 이 풍진 세상에서 보기 좋게 살아남아라. 이 못난 아비가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하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지만 이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멋지고 아름답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고단하지만 행복한 여행길을 떠났으면 싶구나. '

<김경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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