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왕 에디슨, 할리우드 탄생에 'X맨'으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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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사가 투자자를 찾아 강남으로 옮겨 왔지만 여전히 '충무로'라는 이름으로 한국 영화계를 부르듯이 '할리우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의 한 지역 이름이지만 그것은 곧 미국 영화산업 전체를 뜻한다.

왜 미국 영화 제작자들은 할리우드에 자리 잡았을까? 대한민국 면적과 견줘 95~100배라 하는 미국 땅덩이가 넓기도 넓고 동서남북 갈 곳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서쪽 해안을 찾아 둥지를 틀었을까?

딱 잘라 말한다면 발명왕 에디슨을 피해서다. 그 왜 어려서 알을 품고, 달리는 기차에서 실험을 했던 바로 그 위인전의 에디슨 말이다.

   
▲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 일종의 동영상 자동판매기라고 하겠다.
발명왕 에디슨의 대표작은 전구지만 '활동사진'이라는 영화의 옛 이름처럼 사진을 연이여 움직이는 장치 역시 그의 작품이다. 1892년 에디슨은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그것을 볼 수 있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한다.

하지만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그래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와는 좀 다른 개념으로 한 번에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일종의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는 영상 자동판매기였다고 할까? 신기하기는 했지만 당장 산업적으로 큰 폭발력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3년 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도 촬영기와 영사기를 선보인다. 에디슨의 촬영기가 전기를 이용하는 대신 커다란 방 하나에 촬영 대상을 그곳에 데려와야만 했던 데 비해, 뤼미에르 형제의 촬영기는 수동식 크랭크를 돌리는 대신 야외 촬영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뤼미에르 형제는 많은 대중들을 모아 놓고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중요한 특성을 만들었고 무엇보다 산업적인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영화 탄생 몇 주년을 셀 때 에디슨의 1892년이 아닌 뤼미에르 형제의 1895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도 뤼미에르 형제의 이런 공로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다르 감독 같은 양반은 영화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영화 탄생이 아니라 영화가 상업화된 것을 기념하는 거지"라고 시니컬하게 덧붙였지만.

   
▲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 파리 그랑카페에서 자신들이 제작한 3분 남짓한 영화 '기차의 도착'을 상영했다. 이 날이 곧 영화 탄생 몇 주년을 세는 기점이 된다.
에디슨은 얌전하게 방 안에 앉아 발명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전구를 발명하는 것으로 자기 일을 마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GE사를 만들어 사업을 할 정도로 정력적인 사업가이기도 했는데 특허를 이용한 독점에 강했다고 한다.

뤼미에르 형제 방식이 가진 장점을 간파한 에디슨은 그 방식을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영화 산업에 뛰어든다. 뉴욕에서 바이오그래프라는 영화사를 차린 에디슨은 영화 제작과 상영을 활발하게 벌이고 뒤를 이은 영화사들이 뉴욕과 시카고 등지를 무대로 활동을 시작한다.

장사도 잘 되고 탄력 받은 에디슨은 1908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10여개 영화사를 묶어 영화특허회사(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를 만들어 시장 독점을 시도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촬영기와 영사기에 관한 특허를 무기로 새로운 경쟁자는 아예 싹수부터 잘라 버리겠다는 심보였다.

에디슨은 영화 미학(?)에서도 신흥 영화 제작자들과 골이 깊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동향을 참조하고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장편영화를 만들고자 했지만, 에디슨은 영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아예 자신의 독점력을 이용해서 영화 길이마저 제한하려 들었다.

에디슨의 영화특허회사에 속하지 않은 영화사들은 에디슨 영감의 감시망을 피해 멀리 서쪽으로 옮겨갔다. 1911년 네스티사가 당시는 깡촌이었던 할리우드에 첫 스튜디오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소문 듣고 몰려온 영화사들이 자리를 잡아 나갔다.

저 멀리 뉴욕에서 할리우드까지 특허 감시하러 오기도 쉽지 않았던 데다가 1915년에는 에디슨의 영화특허회사가 독과점 위반 판결을 받아 할리우드는 에디슨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영화 제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상황이라 만드는 족족 대박을 치는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 위인전 터줏대감인 발명왕 에디슨. 축음기와 영사기를 발명했으니 현대 대중문화에도 끼친 영향이 크다. 할리우드 탄생에도 일종의 'X맨'으로 활약? ⓒ 중앙출판사
처음에는 에디슨 영감 눈길을 피해서 서쪽으로 왔지만 막상 자리 잡고 보니 할리우드처럼 영화 찍기 좋은 곳도 없었다. 바다부터 시작해서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사막도 있어서 다양한 촬영 장소가 있었던 데다가 날씨마저 좋아서 우중충한 뉴욕에 비한다면 그림 때깔부터가 잘 나왔다고.

에디슨과 할리우드 이야기는 지금도 저작권 관련 책들에서 심심찮게 언급되는 특이 사례, 또는 실패 사례 중에 하나로 남았다. 에디슨이 생각한 영화는 이야기를 즐기는 것 보다는 흥미 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짧은 영상에 가까웠는데 만약 에디슨의 독점이 성공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돈다고 지하철에서 휴대폰이나 휴대용 멀티미디어 기기들을 이용해서 짧은 동영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일종의 1인용 동영상 자동판매기였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떠올리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짧은 콘텐츠로 재가공 되어 휴대용 개인 미디어에 탑재되는 것으로 에디슨과 할리우드의 화해를 대신해 본다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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