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 축제분위기

이 기사는 광주뉴스와 오마이뉴스간 협약에 의해 게재한 기사입니다.

현대 정신분석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올해는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고, 오는 5월 6일은 그의 탄생일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그의 1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들이 열릴 예정이다.

물론, 그를 기념하는 행사는 프로이트가 47년 동안 거주한 집이자 환자들을 치료한 곳인 비엔나 9구의 베어르그가세(Berggasse) 19번지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이곳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탈바꿈했으나 지금도 그가 환자들을 상담했던 상담실, 글을 쓰던 작업실, 진료를 기다리던 대기실 등은 가구들만 빼고 그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베어르그가세 19번지'와 그가 사용했던 유명한 정신상담용 소파 '카우치(Couch)'는 '심리분석'과 동의어로 불린다.

평생 인간의 정신세계를 연구하며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프로이트. 하지만 그도 삶의 희로애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특히 말년에는 지독한 병마에 시달렸다.

나치 피해 영국 망명... 누이 넷은 가스실에서 죽음

프로이트는 1856년 구 체코슬로바키아(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의 모라비아 프라이버그에서 태어났다. 4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특했던 프로이트를 위해 그의 부모는 없는 살림이지만 그가 책을 읽을 때마다 남포등을 켜주고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는 촛불을 켤 만큼 학업을 장려했다고 한다.

무의식과 성격 이론

프로이트는 마음을 빙산에 비유해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부분이 '의식'이라면, 물 아래의 훨씬 더 큰 부분을 '무의식'으로 보았다.

그는 무의식이 생명에 대한 하층구조로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임을 강조하며 그것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프로이트는 40여 년에 걸쳐 '자유 연상'의 방법으로 무의식을 탐구했고, 이를 토대로 독특하고 포괄적인 '성격 이론'을 탄생시켰다.

비엔나국립의대를 졸업한 프로이트는 신경학, 꿈, 성, 죽음 등 인간의 정신세계에 관해 무수한 논문과 저서 등을 발표했다.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페티시즘, 유아의 성욕, 항문에로티시즘, 여성의 불감증 등 범상치 않은 이런 용어들을 입에 담은 대가로 프로이트는 젊은 시절 비엔나의학연구회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현대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 학회는 75세의 노장 프로이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이 유태인 심리학자의 목숨도 위태로워졌다. 합병 3일 후인 3월 15일 나치는 평화롭던 베어르그가세 19번지로 쳐들어와 이 세계적인 석학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가족들이 소지한 현금과 여권을 빼앗아갔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쇄한 프로이트 박사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압박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프랑스의 여성심리학자 마리 보나파르트가 애쓴 결과 그는 딸 안나와 함께 3개월 후인 6월 15일 영국 도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극적이었다. 보복으로 나치는 프로이트의 누이 넷을 모두 가스실로 보내 잔인하게 살해했다. 당시 누이들은 모두 칠십을 넘긴 고령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도착한 프로이트 앞에는 나치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던 프로이트는 런던에서 한 차례 더 암수술을 받아야 했다. 생체조직 검사에서 악성종양을 발견한 의사들은 프로이트에게 수술이 불가능한 불치암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939년 9월 23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런던에서의 삶을 고통으로 보냈다.

골초 프로이트, 시가와 커피 없이는 못살아

   
▲ 프로이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프로이트가 피우던 시가.
ⓒ 배을선
1923년 처음 암 선고를 받았으니 프로이트는 죽기까지 무려 16년을 고통 받았다. 그에게 암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시가'였다.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살 정도로 골초였는데 특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아직도 그가 즐겨 피우던 시가와 시가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평일에는 환자들을 상담하고 일요일에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적어나갔는데 이럴 때면 항상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온몸에 암세포가 퍼지면서 그는 두 가지를 단념해야 했는데 바로 담배 피는 것과 저술 활동이었다. 담배를 끊은 후 프로이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담배를 끊은 이후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담배를 끊은 것보다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더 슬프다."

   
▲ 카페 코어브. 프로이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커피를 마시곤 했던 카페. 지금도 유명한 카페하우스 중의 한 곳으로 남아 있다.
ⓒ 배을선
또 그는 담배뿐만 아니라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발병 이후에는 커피도 삼가야 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보티브성당 앞의 공원을 거닐다 자신이 재직하던 비엔나국립대학교의 도서관으로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아마 프로이트는 속이 출출해지면 대학교 앞의 전통카페하우스 '카페 란트만'에서 커피 한 잔과 토르테 한 조각을 즐겼을 것이다.

비엔나 중심가에 있는 '카페 코어브'는 그의 단골 카페였다. 프로이트는 자주 이곳에 들러 홀로 커피를 마시거나 사색을 즐겼고, 동료 학자들과 비엔나심리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독한 시가와 쓴 커피를 입에 댈 수 없게 됐다. 그 괴로움이 컸던 탓일까. 프로이트는 마사 버네이즈에게 "외롭지만 않다면 건강한 게 최고"라고 말했다.

암의 고통,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살고 싶다

   
▲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에 걸려 있는 프로이트 그림.
ⓒ 김성수
죽음을 학문적으로 연구했지만 프로이트도 죽음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 못하고 젊음을 부러워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친구에게 그는 "여든 살 된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는 대화거리가 못 되네"라며 "젊음이 최고"라고 말했다.

또 한 미국인 방문객에게는 "젊음에 가치가 없다는 것은 진실과 반대입니다. 젊음이야말로 유일한 가치죠. 늙은 게 뭐가 좋습니까? 특히 여자들은 늙으면 흉해지죠. 남자들도 다를 바 없지만!"이라고 농담을 했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죽을 시기를 예측하기도 했으나 맞지는 않았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이복형제 임마누엘이 81세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신도 81세에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도 81세를 넘기자 어머니가 사망한 95세에 자기도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81세도, 95세도 아닌 83세에 생을 마감했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프로이트는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런던에서 받은 세 번째 암 수술 이후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특히 턱뼈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이러한 통증, 혹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더욱 집필에 열중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기 위해 진통제를 거부하기도 해 가끔 의사와 다투기도 했다. 그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혼미한 정신보다는 맑은 정신을 갖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프로이트는 <모세라는 인물과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1938)를 탈고했고 <정신 분석 개론>(The Outline of Psychoanalysis)을 써나갔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조바니 코스티간은 "그가 고통 속에서 쓴 저서들에 진부함이나 지루함은 없다.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럽던 기간에 쓴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없다. 다만 젊음의 활기와 자신감이 넘쳐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고 밝혔다.

영원히 불멸로 남을 프로이트

   
▲ 베어그가세 19번지. 프로이트가 47년간 살았던 집이자 환자들을 치료했던 병원(?). 지금은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프로이트가 살았던 그대로를 전시하고 있다.
ⓒ 배을선
하지만 말기의 프로이트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암세포가 피부를 뚫고 나와 눈 주위까지 감염됐으며 세균에 감염된 피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갔다. 1939년 9월 21일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치의 슐 박사에게 말했다.

"자네 더 이상 살아갈 가망이 없을 때 나를 편안하게 가게 해주겠다던, 그 약속 잊지 않았지?" 결국 슐 박사는 두 차례에 걸쳐 프로이트에게 모르핀을 투약했고 그는 끔찍한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 잠과 같은 죽음을 맞았다.

고통 속에서도 프로이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고 인생을 그대로 직시했다. 그는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죽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추억 속에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불멸입니다."

정신분석의 안소니 스토는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조언을 주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소리에 오랜 시간 귀를 기울인 프로이트의 기술이야말로 현대적 형태의 대부분 정신치료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은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말했다.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딱딱한 심리학개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추억'과 '대화'를 통해 150년을 살고 있다. 이게 바로 그가 말한 단 하나의 불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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