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의 문화칼럼]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광주(廣州) 땅에 관심을 가지며 묘하게 필자가 전공한 전통분야와 자주 만나지는 지점이 있다. 2021년을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오늘과 이어지는 역사 속의 시간과 현장이 그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비단 광주만 그러한 것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유난히 광주를 오가면 필자가 평생을 다해 공부하고 있는 다양한 전통에 관한 장르를 다시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꽃샘추위로 다소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봄기운이 완연한 날 오후 ‘광주향교’를 찾았다. 그날은 마침 광주향교에서 공기(孔紀) 2572년 춘기석전 봉행 된 날이기도 하였다. 직접 석전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이런 의식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향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주로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하고 강화했기에 향교에는 조선의 중요한 유학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본 칼럼 ‘숭렬전(崇烈殿)의 제향(祭享)’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성균관 대성전에서의 문묘제례가 이곳 광주향교에서도 1년에 두 번, 춘기, 추기석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니 전국 향교에서는 모두 같은 의식을 같은 시기에 거행하는데 음력으로는 2월과 8월 초정(음력 1~10일 사이)에 거행한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지역별로 다르거나 상황에 맞게 행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광주향교(廣州鄕校)가 위치한 곳은 경기 하남시 교산동 277-3번지이다. 최근 교산 신도시 개발로 주변에는 각종 부동산 관련 현수막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어수선했다. 이제 이곳이 개발되면 광주향교는 아파트 숲속에 외롭게 덩그러니 놓이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담담히 자리하고 있는 ‘광주향교’는 한눈에 보아도 예스러운 모습이다.

광주향교는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에 있던 것은 1703년(숙종 29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 하남이 광주시에서 하남시로 분리되며 하남시 소재가 된 것이고 이름은 그대로 ‘광주향교(廣州鄕校)’로 사용하고 있다. 예부터 그 이름을 사용했으니 지명이 바뀌었다고 이름마저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명륜당(明倫堂)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명륜당을 바라보며 우측에 동재(東齋) 좌측에 서재(西齋)가 보인다. 이곳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서재는 한눈에 봐도 오래되었다. 세월의 무게를 못 견뎠을 것이다. 그래서 공사 중이라 출입금지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꽃샘추위라 해도 소매 속을 파고드는 차가움이 매서운데 이런 곳에서도 오로지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혹한의 추위를 견디었을 것을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명륜당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야트막한 담 뒤로 보니 대성전(大成展)이 보인다.

대성전은 성균관에 있는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춘추시대의 학자인 공자(孔子)와 여러 성현(聖賢)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오늘날 이런 제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시 생각해 보지만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육’이라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특정 인물이 아닌 훌륭한 교훈을 남긴 사람들에 대한 추앙과 그를 따르려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옛사람들이 그 시대의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구획하고 계획했을 공간과 공간의 목적이 시대가 바뀌어 간다고 무조건 같이 바뀌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광주향교를 돌아 나오는 마당 주차장에 아주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이를 보며 조선시대 인재양성의 요람이었던 성균관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오버랩된다. 성균관 마당에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지 않고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있는 단’인 ‘행단(杏壇)’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래된 성균관 은행나무는 전국에 있는 향교로 뻗어 나갔을 것이라 짐작한다.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절정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봄을 맞아 파릇한 새잎이 돋아나고 있는 것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봄을 맞아 명륜당 옆에 활짝 피어난 홍매화도 그렇고 푸른 어린잎을 돋아내는 은행나무도 그렇다.

교육기관인 향교를 관장하는 성균관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고려와 조선시대때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이름은 주례(周禮)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주례(周禮)는 법과 관직 체계 등을 총망라해 놓은 책인데 이곳에 ‘성균’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오제(五帝)의 학(學)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알려져 있다. 인재양성의 요람에 음악을 조율(調律)한다는 뜻을 가진 ‘성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더라도 '조화'와 '조율'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래서인지 성균관 유생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서도 풍류도 함께 즐겼다고 하니 진정한 멋쟁이였던 것이다.

‘광주향교(廣州鄕校)’는 지금의 수원, 화성, 의왕, 성남, 광주, 강동, 강남, 송파까지 관장하던 가장 큰 향교였다. 오래전 하남을 비롯한 성남, 강동 등의 여러 일대가 광주 땅이었던 것을 기억해 보면 가히 ‘광주(廣州)’란 이름에 ‘넓을 광(廣)’을 쓰는 이유를 알겠다. 다시 옛 땅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갖고 있는 것이라도 잘 지켜서 보존하고 유지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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