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의 문화칼럼]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광주지역을 다니다 보면 자그마한 한옥 건물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전 같으면 그냥 ‘아직 잘 보존되어 있는 옛날 집’ 정도로 여겼겠지만 이제 눈 여겨 보게 된다. 광주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만났던 중대동 어느 골목에서 만나게 된 이택재(麗澤齋)도 그런 곳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곳인 이택재를 찾게 된 것은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택재(麗澤齋)는 조선후기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경기도 광주시의 향토문화유산(유형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된 유적이다. 이택재 옆쪽으로는 순암 안정복의 비와 더불어 광주 안씨(廣州安氏)의 유래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광주 안씨의 시조인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 때의 뛰어난 광주지방의 관리였다고 한다. 당시 공적을 세우면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그 공으로 지금의 광주 땅을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논밭)로 받았고, 광주를 본관으로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손인 순암 안정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서 은거하다가 10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순암’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이곳이 바로 이택재이다.

이곳에서 안정복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한 하였다고 한다. 후일 안정복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였고 이후 타계하기 까지 20편의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의 근간이 되는 곳이 이택재라고 하니 이곳이 지닌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택재가 있는 마을의 이름은 ‘텃골’. 이름처럼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 안쪽으로는 깔끔해 보이는 빌라촌이 있고 입구 즈음에 이택재가 자리해 있다. 작은 개울을 건너 보이는 이택재는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엄격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학문을 갈고 닦은 서재로 사용되었던 만큼 저절로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안정복은 35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로 들어갔고, 38세 되던 1749년(영조 25)에야 본인 스스로 마다했던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로 가게 되고 이후 다시 18년간 저술활동에 몰두했다고 한다.

안정복은 61세에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되는데, 세손(정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는 당시 학자로서의 학문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66세에는 목천현감이라는 수령을 맡았다고 한다. 72세에는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돈녕부 주부(정6품)·의빈부 도사(종5품)·세자익위사 익찬(정6품) 등을 역임했다고 하는데 관직에 늦게 진출하였지만 참으로 오래도록 나라의 일꾼으로 일한 것으로 보아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7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안정복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즈음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는 긍정적일 수 없었다. 평생을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의 보수주의 실학자로 살았던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성호 이익의 제자들 즉 성호학파 문인들은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다.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전자를 성호우파, 후자를 성호좌파라 한다. 이렇듯 안정복은 천주교를 비판하는 강성에 비롯해 책까지 쓰게 된다. 한참 늦은 나이 74세때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낸 것을 보면 얼마나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안정복의 후손 중에는 천주교를 수용했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인)의 동생 권일신(權日身, 1742~1791조선 영조·정조 때의 가톨릭교인)이 사위이다. 안정복은 사위가 천주교를 따르는 것을 계속적으로 경계했다고 하는데 권일신은 결국 순교하였다.

종교를 사이에 두고 다른 의견을 가졌던 장인과 사위.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택재를 찾게 했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안정복의 후손들 즉 광주 안씨 종친에서 광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천주교 순례길 조성에 적극 찬성하며 조상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박해받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하고자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광주(廣州)의 ‘넓음’을 다시 생각하고, 이택재를 바라보며 많은 갈등 속에 학문을 탐구했던 안정복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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