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의 문화칼럼]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정치와는 그 어떤 연(緣)도 없는 내게 정치에 대하여 처음으로 가깝게 접하도록 해주신 분이 계시다. 친구의 부친이셨던 해봉(海奉) 정필선 선생님. 선생은 우리나라 해병대 최초의 정훈감(政訓監:각 군 본부에서 군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 이념 교육 및 군사 선전, 대외 보도 따위에 관한 일 등을 맡아보는 부서)을 맡으셨고, 광복군의 판사처장(判事處長)으로도 활동한 서예가셨다.

선생은 처음 본 나에게도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며 오래전 선생이 경험했던 광복군 시절 이야기, 정훈감 이야기 등등을 해주셨던 것 같은데, 그때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이야기 중에 들었던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선생(호칭이 애매하여 이하 ‘선생’으로 통일함을 밝혀둔다)이다.

광주시를 오가며 ‘해공로(海公路)’라는 이름을 보며 조금은 의아했었는데, 그 이름이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의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생가터와 더불어 오래전 친구의 아버님인 정필선 선생을 떠올리고, 그분의 서예 전시회 안내를 위해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 등등이 새록새록 떠올려져서, 내친김에 생가터로 향했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다 광주IC를 빠져나가면 7시 방향으로 난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무갑리를 오가며 늘 다니는 길로 사계절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 교통량이 많지 않아서 한적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로 다리는 중에도 여러 번 지났음에도 이제야 그 길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는데, 해공로에서 ‘해공(海公)’과 함께 ‘해봉(海奉)’이라는 단어까지 연결된 것을 보면 아주 작지만, 인연 아닌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신익희 생가터’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 위치해 있는 경기도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의 생가 터는 근처에 있었으나 장마와 한국전쟁 등으로 지금의 장소로 이전, 보수하였다고 한다.

지난 월요일 이곳을 찾으니 역시 코로나로 인한 ‘임시휴관’이란 안내문만 붙어 있을 뿐,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서성거리는 필자를 발견한 이웃 할머님이 귀띔해 준 대로 뒤쪽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니 생가터 내부가 웬만큼은 들여다보인다.

내부에 들어서서 보는 것이 아니기에 속속들이 볼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으나 담백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볕이 잘 드는 마당, 공간과 공간의 친근한 간격, 단층임에도 결코 낮게 느껴지지 않는 안정감, 탁 트인 주변의 시원함 등등이 상쾌하게 다가오는 곳이었다. 이런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한 개인으로서의 삶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고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런 곳에서 뛰놀고, 학업에 열중하면서 미래를 준비했던 사람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잠깐 궁금해진다. 

입구에 있는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 -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이며 광복후 제헌국회 부의장 국회의장을 역임한 신익희(1894~1956)선생이 어릴 때 살던 집이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 약200m 거리에 있었는데 1865년(乙丑年) 대홍수 때 파손되어 이 곳으로 옮겼다.’

조금 더 선생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해공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외무부장, 내무부장 등 역임. 광복으로 귀국 이후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학장, 1948년 제헌국회 제2대 의장, 1955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1956년에 민주당공천 대통령 후보, 다수국민의 지지를 받던 중에 급서, 1962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韋)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익희생가 [申翼熙生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익희 선생에 대해서 들었던 옛이야기 중에 다른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정필선 선생께서 무척이나 존경하고 따르던 분이라는 것이 기억난다. 그와 더불어서 두 분이 함께 서예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던 이야기 등등이 떠오르며, 마치 내가 직접 알았던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어쩌면 신익희 선생의 생가터에서 나의 옛 추억을 더 반갑게 맞이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신익희라는 근대사에 기억될 인물을 배출한 광주시의 또 다른 의미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혹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신익희 선생 또한 공(功)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過)도 있다. 그런데 너무 ‘공(功)’만 부각되고 있다’고. 그러하리라. 공과(功過)를 분명하게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생가 입구에 신익희 선생이 남긴 어록이 직접 쓴 서체로 남아 있다. 그중에 한 가지 글이 눈에 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모르는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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