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의 문화칼럼]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새해가 밝자 새벽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광주로 향한다. 작년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다녔던 이 길이 올해는 또 어떻게 다가올까 기대하며 겨울 풍경이 가져다주는 명징함이 머릿속과 가슴 속을 더 맑게 한다.

늘 그렇듯 연말과 연시는 날짜로 보면 별반 차이가 없지만 맞이하는 기분은 전혀 다르다. 새해에 처음 찾는 광주는 좀 더 친근한 곳이었다. 많은 곳을 둘러보았지만, 그 중 특히 애착이 가는 곳은 남한산성이다.

새해 첫 발길을 이끈 곳은 '남한산성 순교성지'였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차로 이동하면 쉽사리 잘 보이지 않는다. 굳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찾고자 해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외양은 한옥으로 지어져 있어 이곳이 천주교 성당이라고는 짐작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을 ‘성당’이라 부르지 않고 '남한산성 순교성지'라 부르는 것은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 끌려와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남한산성 순교성지'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1998년 9월 30일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2004년 9월에 이곳에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고 이후 2015년 4월 25일에 지금의 새 성당을 건립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먼저 ‘순교자현양비’가 보인다.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그중에서 행적이 밝혀진 복자(福者:가톨릭교회에서 성인 전 단계로 순교하거나 덕을 쌓아 신자들의 공경을 받는 사람)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한 36명의 명단이 ‘순교자현양비’에 적혀있다.

현양비를 바라보며 왼쪽에 있는 ‘피에타’는 순교한 시신을 안고 있는 한덕운 토마스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이곳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는 곳이었는지를 깨달으니 가슴속 한 편에 묵직함과 엄숙함이 자리한다.

현양비를 보고 뒤를 돌아서니 한옥으로 된 성당이 보인다. 성당 입구 기둥에는 ‘영혼의 안식처 남한산성 순교성지’라는 글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원래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토마스홀’이 있고 마주 보는 곳에 한문으로 크게 ‘성당(聖堂)’이라고 쓴 현판이 걸린 한옥 건물이 보인다.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하면서도 엄숙함이 느껴진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온기에 얼었던 몸이 녹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으니 속절없이 눈물이 날 것 같다. 오랜 세월 바깥을 떠돌다 홀연히 돌아온 시골집 같은 느낌이 든다. 고단했던 그동안의 삶을 위로해 주는 기운이 들지만, 너무 멀리 와버린 마음에 착잡해진다.

마음으로도 무척 힘들었던 시절 잠시 머물게 된 인천에서 그곳에 살던 분(대모님)을 따라 인천의 답동 성당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그 안에서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성가에 매료되어 덜컥 교리를 신청하여 듣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1983년) 부활절에 영세를 받았고 몇 년 후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성가를 부르는 ‘노엘합창단’ 단원이 되어 우러러 보기만 했던 성전위에 서서 꽤 오래도록 합창발표회도 했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인천까지 성당을 다녔고 합창단 연습에도 빠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냉담자가 되어버렸다.

‘냉담자(冷淡者)는 세례를 받았지만 교회나 성당에 나가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 날 성당 밖에 서 있는 나는 ’냉담자‘가 분명했지만 성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냉담자‘가 아니었다. 그곳에 잠깐 머무는 시간이 그런 생각을 갖게 하였다. 따스한 곳, 온기로 맞아주는 곳, 사랑으로 감싸주는 곳이 성당이고, 언제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곳임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연말에 광주시의 멋진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로부터 시작하여 천진암 성지로 이어지는 문화 역사 탐방길(순례길)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전에 알고 있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 구체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그런 이유에서 ‘남한산성 순교지’는 더더욱 많은 의미를 갖는 곳이다.

2021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공존하는 지금 이런 멋진 계획이 있는 광주에서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져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남한산성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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