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몇몇 사람들이 모이는 가운데 처음 만난 사람이 있으면 으레 명함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이 명함은 상대방이 뭐 하는 사람인지, 또는 이름을 보게 되는데, 간혹 한자로 된 명함을 받고 혹여라도 종씨를 만나게 되면 유난히 반가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같은 성씨를 쓰고 있다는 것은 동질감 이상의 또 다른 혈맹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성씨를 만나면, 본(本)을 물어보고, 본이 같으면 어느 파(派)인지까지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같은 성씨, 종씨에 열광한다. 이유를 알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간단할 것이다. 바로 같은 핏줄을 나눈 가족이기 때문인 것이다.

본인은 버들 ‘진주류씨(晉州柳氏)’이며 성씨 ‘유’자는 ‘버들 류(유)’자를 쓰고 있는데, 본관에 해당하는 ‘진주’에 가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본관’이라는 것은 그저 성씨(姓氏) 앞에 붙는 수식어 정도의 의미였는데, 최근 경기도 광주를 오가며 광주이씨가 있고, 광주이씨의 재실까지 가게 되었다.

경기도 광주이씨의 재실인 ‘고덕재(高德齋)’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초월읍 신월1리 마을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덕각 안에는 ‘묘갈(墓碣: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는 묘비(墓碑’로 통용되는데 ‘네모진 것이 비, 둥근 것이 갈’이라고 한다[네이버 지식백과])이 있었는데 평범해 보이는 동네에 묘갈이 세워져 있으니 이유가 궁금하였다.

묘갈에 쓰인 글은 후에 확인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한다.

‘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公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漢나라 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어찌할 수 없구나.
 성군(聖君)의 도량이 아닌지라 公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드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정덕 십삼년 겨울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손(蓀) 입비

[출처] 고려 절신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의 비문과 돌여울에 대한 고사(故事)

평범해 보이지 않은 묘갈을 보고 안 쪽으로 더 들어가 보았고, 그 안에 고덕재를 비롯한 광주이씨와 관련된 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꽤 높이 자리 잡은 여러 묘를 돌아보다 광주이씨의 시조인 석탄(石灘) 이양중 선생의 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양중 선생은 고려의 유신이었다고 한다.

이양중 선생은 1350년대에 태어나 1400년대에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나 출생지나 생몰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한 사람으로 고려 말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한 후에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하지 않고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친구로 지냈는데, 태종이 즉위한 뒤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임명하였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고, 이후에도 태종이 여러 차례 그의 은거지를 찾았으나, 한결같이 평복 차림에 직접 빚은 술로 대접하면서 벼슬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태종도 고려 왕조에 대한 이양중의 뜻을 꺾지 못했다고 전한다. [내용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이야기를 접하며, 굳은 절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선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광주이씨 후손들은 그런 선조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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