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농악 이야기

광주시 남한산성면은 남동, 북동, 불당리, 광지원리, 엄미리 등을 합하여 만든 행정구역으로 광주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부면이라 하였다가 2015년 남한산성면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바뀌었다. 

그 중 광지원리는 현재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하남시와 광주시의 교차로 인근 남한산성 입구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형이 완만한 구릉 지대이며, 광지원 초등학교가 위치한 ‘안말’, 길 건너 바깥에 위치하는 ‘바깥말’, 광지원교를 건너 섬처럼 떨어져 있는 ‘섬말’로 이루어져 있다. 

광지원리는 조선시대 관리나 역마가 쉬던 황교원(黃橋院)이 있던 교통의 요충지이었다. 원(院)이란 관영 숙박시설을 일컫는 말로 당시 광주에는 총 16개의 원이 있었다. 광주 지역에 이렇게 원이 많았던 것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 세종의 무덤)과 영릉(寧陵, 효종의 무덤)에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어갔기 때문이다. 광지원리에 설치되었던 황교원 인근에는 큰 연못이 있어서 그 물이 맑고 달빛이 반사되면 영롱한 빛을 발하였기 때문에 그 일대를 ‘광지원’(光池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광지원리에는 지역 내 많은 둔전(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이 있어 둔전병들의 군악으로 농악이 사용되었는데 둔전 제도가 폐지되면서 군악은 연초에 행해지는 농악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삼한시대부터 시작한 농악은 본래 생산현장의 율동적 타음이 토착신앙의 의식음악인 무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삼한시대는 풍물이라 했고 삼국시대는 풍장, 고려시대는 매구, 오늘날의 농악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쓰인 것이라고 한다.

농악은 공동체 의식과 농촌 사회의 여흥 활동 일환의 하나로서 발전해왔으며. 타악기 합주와 함께 전통 관악기 연주, 행진, 춤, 연극, 기예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마을신과 농사신을 위한 제사, 액을 쫓고 복을 부르는 축원, 봄의 풍년 기원과 마을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업을 위한 재원 마련 행사 등, 다양한 마을 행사에서 행해졌다.

또한 ▲평야를 중심으로 발달한 경기농악 ▲유랑집단인 남사당패의 웃다리농악 ▲노령산맥을 끼고 발달한 좌도농악 ▲넓은 호남의 들에서 생겨난 우도농악 ▲태백산맥의 맥을 따라 발생한 영동·영서 농악 ▲천안의 흥타령농악 등으로 각기 그 지리적 조건에 적합하게 발전해왔다.

광지원리는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악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농번기, 중추절, 정월대보름을 맞이하여 마을의 풍년과 안녕, 마을 공동체의 단합을 목적으로 행해져 왔다. 또한 남한산성의 수어청에 파견된 재인청(민간예능인의 예능 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하던 곳) 소속 재인들이 마을에 많이 살아서 그 명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이처럼 광지원리의 농악은 그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명맥을 이어왔지만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주민들의 고령화, 농사의 기계화, 주민수의 감소 등으로 인해 1990년대 말에는 단절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광주 광지원 농악이 새로운 부흥을 맞은 것은 1997년 광주 종합고(現 광주 중앙고)에 농악단이 창설되면서부터이다.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이원대 교장의 지원과 민성기 교사의 지도하에 농악단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광주시와 광주 문화원의 후원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광주 시립 광지원 농악단의 모태가 되는 풍물패가 결성되었다. 

이후 광지원 마을의 강보석 어르신과 안성농악의 김기복 선생 등의 지도를 통해 광주 광지원 농악을 보다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할 수 있었으며, 2009년에 광지원 농악 보존회가 결성되고, 2010년에는 시립 광지원농악단이 창립되어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시립 광지원농악단은 광지원농악 외에도 다양한 공연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광주시 문화예술의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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