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조선백자의 핵심 광주 도자 이야기

- 조선, 역성혁명을 통해 왕조수립 후 백자로 정체성 확립

조선 시대는 과히 백자 시대라 칭할 수 있다. 분청사기와 청자가 백자에 흡수되고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이었으며 그 중에도 문양이 없는 순수 백자가 90% 이상이었다. 이는 납에 채료를 섞어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은 중국 백자와도 다른 조선의 독창적인 도자 문화였다. 비록 후기에 와서는 순수 백자만을 지향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이 있는 백자도 생산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화려한 채색과 문양의 백자가 등장하게 되지만 실용적이며 단순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근본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는 역성혁명을 통해 수립된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표방하고 건국한 조선은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지도이념에 맞는 정책과 제반 시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의 분청사기와 차별되는 새로운 백자 제조기술의 수립과 확산은 그 시책에 적합하였다. 백자는 기술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고 검약(儉約)을 기본 덕목으로 삼는 성리학의 사상에도 순수 백색(白色)의 백자는 합당한 색상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조선 초 왕실에서는 고려에 이어 분청사기와 백자를 병행해 사용하였었으나 앞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왕실의 백자 선호도는 점차 높아져 갔고 민간의 수요도 늘어나게 된다.조선 초 학자 성현이 고려 시대로부터 조선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풍속·문물·제도 등을 다룬 <용재총화>에 기록한 “세종의 어기는 백자만을 사용한다”라는 기록은 당시 왕실의 백자 선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 관악산, 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 되어 갔으며, 그 중에서도 광주는 중앙 관요의 역할을 이행하던 조선백자의 핵심지역 이었다.

- 1467년 전후 사옹원 분원을 광주에 설치 백자생산 전담

이런 조선백자의 발전과 확산에는 사옹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사옹원은 조선 왕실과 궁궐에 필요한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세조 말년 무렵에는 왕실·궁중행사·사신영접 등을 위한 음식조달과 더불어 사기번조(사기그릇을 구워만들어 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1467년을 전후하여 사옹원에서는 분원을 경기도 광주에 설치하고 왕실용과 관사용 백자를 전담하여 생산하는 관요의 역할을 이행토록 하여 품질 좋은 백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된다

왕실과 민간의 수요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백자의 대규모 제작을 위한 형태와 품질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고, 광주는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깝고 한강을 통한 백자 수송이 용이하였으며, 자기의 원료인 양질의 백토와 땔감이 풍부하였기에 사옹원의 분원이며 관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 분원 설치 전 광주 백자의 명성은 이미 천하제일

앞서 광주 백자의 명성은 광주분원이 들어서기 전인 세종 때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세종 7년(1425) 명의 사신 윤봉이 황제의 명이라 하며 10개의 탁자에 쓸 사기그릇을 요구하였고 조정에서는 “광주목사에게 명나라에 보낼 ‘대·중·소 백자 장본 10개’를 정밀하게 번조하여 바치라”고 하였다. 또 <용재총화>에서는 “외방 각 도에서 자기를 만드는 자가 많으나 오직 고령에서 만든 것이 가장 정절(精絶)하다. 그러나 광주의 것은 더욱 정절하다”라고 극찬하며 당시 광주에서 이미 매우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분원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백자를 만들기 시작하고 약 10년이 지나면 나무가 소진되어 다시 나무가 많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상례였는데 광주에서는 퇴촌면·실촌면·초월면·도척면·경안면·오포면(우산리, 건업리, 번천리, 도마리, 관음리, 분원리 등) 6개면 안에서 이동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분원은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이동하면서 설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분원을 설치한 곳은 나무를 베어 사용한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으므로 땔감 거의 없다. 그러므로 부득이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옮겨 설치하여야만 사기를 만들 수 있다”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광주시에 분포해 있는 300여개의 백자 가마터는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던 분원의 역사이며 발자취이다.

또 분원에서는 봄과 가을로 나눠 1년마다 2회에 걸쳐 백자를 제작하고 배에 실어 한양으로 보냈으며 이렇게 한양으로 들어온 백자들은 사옹원에 의해서 검사를 마친 뒤 진상되었다. 

이런 사옹원과 분원에 소속된 사기장은 1140여명으로 지방에서 백자를 제작하다가 의무적으로 3년마다 광주분원으로 들어와 부역을 하였는데 고된 노역으로 인해 도망가는 장인이 증가하여 17세기에 821명으로 줄었으며. 이에 장인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강제적으로 자손에게 세습하도록 규정하기도 하였다.

 - 10년마다 이동하던 분원,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

한편 숙종 때에 이르러 분원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한번 분원이 설치되어 수목을 채취한 곳은 곧 화전민들에 의해 화전으로 개간되었기 때문에 10년 주기의 이전은 무의미해지게 되었다. 또한 분원 이전 시 새로운 분원에 필요한 수백 여 채의 건물 건축을 위한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 등도 사회문제가 된다. 이에 분원 고정론이 대두되게 되었고 결국 영조 28년(1752년)에 분원을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시키고 땔감을 다른 지역에서 공급받아 분원 이동으로 야기되는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즉, 분원을 한강변에 설치하고 한강 상류인 강원도, 충청도에서 오는 뗏목과 상선으로부터 나무와 세금을 걷어 분원을 운영한 것이다. 이처럼 분원이 고정되면서 552명의 전속장인과 잡역으로 분업화된 대규모의 관요 체계를 장기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30여년간 운영되어 오던 광주분원은 고종 21년(1884)에 민영화되어 관요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되고 19세기 말부터는 일본의 기계 생산품 도입으로 인해 전통 자기 산업이 황폐화 되기 시작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현재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주변에는 300여개소의 가마터가 쓸쓸히 남아 그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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