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전) 국악방송 본부장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가을 단풍이 들면 가 보리라 생각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천진암을 드디어 며칠 전에 가게 되었다. 퇴촌에서 천진암으로 들어가는 길은 참으로 오랜만에 즐기는 단풍길이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양쪽 산등성이에 노랗게 물들어 가는 가을 색은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 내기에 충분했다. 굽이굽이 멋들어지게 채색된 단풍길을 그냥 차로 올라가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천히 걸어서 계곡의 산뜻한 바람을 맞으며 좌우 풍경 들을 만끽하고 싶었다. 다음에는 차를 두고 걸어 가 보리라 다짐해 본다.

천진암, 처음 들었을 때에는 무슨 작은 암자가 있는 곳인 줄 알았었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다. 그 옛날 첩첩산중인 이곳이 어떻게 천주교 발상지가 되었을까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원래 이곳은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승려 300명이 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이름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鶯子峰)에 자리한 천진암. 앵자봉이라니 국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앵(鶯)’자가 유달리 머릿속에 맴돈다. 우리나라 궁중무용의 하나인 ‘춘앵전(春鶯殿)’이 생각났다. 그 가운데 글자가 꾀꼬리 앵(鶯)이다. 이 ‘앵(鶯)’자가 지명에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문 만큼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유래를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나름 짐작으로는 꾀꼬리가 모여들만큼 아름다운 봉우리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런 아름다운 앵자봉에 위치한 천진암은 역사의 아픔을 갖고 있는 곳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원래 사찰이었던 이곳에 조선말기 유신(儒臣)들의 은거·도피처로 내주고 10여 명의 스님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 이익의 영향을 받아 서학에 눈뜬 남인계 소장 유학자들이 권철신을 중심으로 모여 강학(講學)을 가졌는데 그 중 한 곳이 천진암이었다. 이후 이들은 서학을 공부하면서 천주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래서 이곳이 한국 천주신앙의 발상지가 되었던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이곳에서 천주학을 공부했던 최창현·정약종·이승훈 등이 모두 참수되면서 천진암에 있던 10여명의 스님들도 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함께 참수당하고 절은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올라가니 거대한 십자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천주교의 성지임을 바로 알게 하는 십자가다.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 십자가를 둘러서니 산 위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은 평지가 나온다. 운동장처럼 조성해 놓은 이곳에 나중에 큰 천진암 성지를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좌측으로 눈을 돌리다가 보니 거대한 성모마리아상이 보인다.

강원도 속초 낙산사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해수 관음보살상처럼 엄청난 크기의 성모마리아상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모마리아상이 놀랍기도 하고 황금 왕관은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 천주신앙의 발상지라면 그에 걸맞은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냥 작은 성물을 확대해 놓은 것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가 창조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성모마리아상을 세웠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거대 예수상처럼 말이다. 혹시 이곳에 다시 대성당이 세워진다면 성모마리아상을 다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을 어깨에 걸치며 성모마리아상 앞에 잠시 묵상을 하고 뒤편에 자리한 성당으로 올라갔다. 외관상으로는 박물관 같아 보이는 이곳은 안으로 들어서니 기존 성당과 달리 예배 공간이 세로가 아닌 가로로 배치되어 있다.

성당에 앉아 있자니 오래전 불렀던 미사곡과 찬송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와 더불어 스스로 성당을 찾았던 이유도 함께 기억해 보니 강요하지 않음이 좋았고 객관적이어서 좋았고 그 무엇보다 성스러운 분위기의 성당 안에서 스스로를 성찰해 보는 묵상의 시간이 참 좋았다. 하느님과 만남도 중요하겠지만 그렇게 자유롭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들이 더 좋아서 그리고 세상 어디에 있는 성당이라도 언제든 찾아갈 수 있어서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성당이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아니 바쁘다는 핑계 같은 현실에 쫓겨 성당을 찾는 일이 먼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마음속에는 늘 성당이… 천주교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천진암을 둘러보는 시간은 오랜만에 나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잠시 묵상을 하고 뒤를 돌아 나오는 순간 지는 햇살에 비춰진 교회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햇빛을 받아 빚어내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니 왜 가로로 교회가 지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려오면서 다시 큰 운동장을 둘러보며 이곳에 대성당에 들어선다니 가슴이 설렌다. 천진암은 현재 한국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천진암 성지화’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되던 1979년부터 3만평 규모의 ‘천진암 대성당 건립 100년 계획(2079년 완공)’을 세워 천진암 일대의 거대한 성역화 작업을 추진 중에 있다. 설계에만 15년이 걸렸을 정도로 매우 세밀하게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완공이 2079년도라고 하니 나는 완성된 모습을 볼 수는 없겠지만 많은 것을 상상해 보게 된다.

앞으로 50여년 후에는 이곳이 성지가 될 것이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일반인들이 찾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미리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우리만의 성지순례 길을 만들면 좋겠다. 광주에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산과 계곡이 있는 곳이지 않은가. 트레킹을 하면서 힐링하기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광주이다. 광주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에 있는 순례길이 연결되어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으로 모이게 된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단순히 천주교와 연결된 성지 순례길을 떠나서 종교를 초월한 대한민국의 또 하나의 아름답고 건강한 문화의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을 수도 있고 이를 계기로 광주는 문화관광의 명소로서의 입지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신을 돌아보는 자아의 길’로서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지점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찾는 출발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