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와신상담 ‘남한산성 수어장대’ 이야기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남한산성 내 서쪽 주봉인 일장산(日長山) 정상(해발 453m)에 있어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하며, 수어장대는 병자호란(1636) 때 인조가 군사를 이끌고 청 태종의 13만 대군에 대항하여 47일간 항전하던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추가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대라는 의미로 수어장대라 불리게 되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현재 ‘무망루(無忘樓)’ 현판은 수어장대 동쪽에 비각을 별도로 짓고 비각 안에 걸려있다. 

‘무망루(無忘樓)’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참담한 시련과 아들 효종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갔다 8년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10년만에 죽은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영조ㆍ정조가 여주에 위치한 효종의 능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의 수치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 4면의 바깥기둥 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며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하게 꾸몄다.

수어장대는 건물 외견이 아름다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엽서 사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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