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추석 연휴를 이용해 다시 광주로 가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 한적하고 한산했다. 평소 좋아하는 팔당호를 끼고 달려 다다른 팔당물안개공원에는 코로나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몇 번인가 근처를 지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이곳을 찾게 된 이유는 얼마전 뉴스를 통해 접한 ‘허브섬’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다.

팔당물안개공원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산수로에 위치하고 있다. 공원 안에 있는 ‘귀여섬’에 허브섬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기도 광주시가 도 정책공모 사업에서 대상을 받아 150억원의 예산을 확보했고 ‘팔당 물안개공원 허브섬 조성사업(1단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어서 이후의 행보가 궁금증을 유발했다.

공원에는 자전거 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원 입구에는 2~3인용 자전거, 패밀리 카트, 클래식 전동카 등을 빌려주는 대여소가 있었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걷고 있기에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름 걸었다고 걸었는데 가도 가도 허브섬은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자전거를 타고 인력거 같은 것을 탔는지 왜 그곳에서 그런 것을 빌려주는지 그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냥 무작정 일반 공원을 생각하고 갔던 터라 계속 걷는 것도 쉽지 않았고, 다음 약속 시간으로 인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쉽게 발길을 돌린 이유 중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입구에서 만난 너르게 펼쳐진 연잎 밭의 모습은 연꽃이 피었을 때라면 장관을 이루었겠지만 시들어가는 연잎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정원수 같은 나무들, 군데군데 무리지어 피어난 잡초며 일직선의 콘크리트 길이 다소 마음에 걸렸다. (집에 돌아와 팔당물안개공원에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니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산책은 나중을 기약하며 난 공원을 빠져나왔다.

광주에서의 점심 약속에서 만난 지인에게 투덜거리듯 ‘공원에 별로 볼 게 없다’는 푸념을 하니, 지인은 핸드폰 속의 사진을 보여준다. 내가 다녀왔던 곳의 또 다른 팔당물안개공원의 풍경들인데 말 그대로 동양화 한 폭이다. 아뿔싸, 내가 못 본 것이었다. 아니 시간에 따라 공원의 풍경은 달라지는 것이었다. 다 돌아보지 않고 입구만 보고 돌아와 버린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코끼리가 어떻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인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길은 가을날의 짧은 해가 지고 있었다. 광주 주변의 도로들은 연휴 여행객들의 차량 행렬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방향을 틀어서 다시 공원으로 향했다. 오전의 햇살이 없어서인지 훨씬 서늘했고 산책하기에 적당한 바람까지 불어왔다. 그리고 중앙광장 주변에 심어진 ‘허브섬’도 만났다. 꽤 큰 규모로 조성된 ‘허브섬’의 앞으로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무언가 새로운 시발점이 되고 있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팔당물안개공원은 광주시에 있지만, 관리는 환경부에서 한다고 한다. 상수도원을 끼고 자리한 만큼 매우 중요한 공원인 셈이다. 이곳은 개발을 해서도 안 되고 일반 공원처럼 꾸밀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오전에 보았던 잡초같이 무성해진 풀들도 그렇고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이유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방치된 느낌’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팔당호에 있는 공원임에도 호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나무들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 정도는 잘 정돈되게 하면 안 되는 것일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허브섬’을 조성해서 공원의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후 허브를 이용한 광주시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향후의 모습을 기대해 보며 어둑해진 귀갓길을 서둘렀다. 금세 어두워진 공원 안은 벌레들의 작은 움직임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살짝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퍼뜩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몇 년 전 공연을 위해 다녀온 케냐의 나이로비국립공원이다.

걸어서는 갈 수 없는 사파리에서 운 좋게 사자의 무리를 만났던 날의 아침 풍경이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해가 환한 아침이었지만 숨죽이며 바라보았던 그 광활한 나이로비국립공원의 향기가 팔당 물안개 공원의 저녁 시간에 생각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러고 보니 공원에는 가로등 하나가 없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는 원론적인 목적 때문인 것이다. 어쩌면 이곳은 대한민국의 그 많은 공원 중에서 특히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태초의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 ‘어땠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꾸며진’ 것들이 대부분임을 생각해 보면, 이곳이야말로 안전하게 ‘원시림’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현대사회의 가장 값진 콘텐츠로서의 가치도 함께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마다 풍경이 다르고 투박하고 거칠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져 있는 이곳은 야간 출입이 제한된다고 한다. 이유는 이곳에 살고 있는 동물뿐 아니라 식물의 휴식과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동안 인간 위주로 인간의 필요에 맞춰 조성되었던 공원의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예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콘셉트만으로도 팔당물안개공원의 존재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일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외의 나머지 정돈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것들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왕 ‘허브섬’을 조성하느라 귀여섬의 중심 부분이 사람의 손길로 빗질하듯 결이 고와진 만큼 환경이나 생태계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공원 전체를 더욱 아름다운 청정공간으로는 만들어야 할 것이다.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최소한의 범주 내에서 공원의 본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시설물을 지극히 친환경적인 재료로 설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환경부에 관리 권한이 있긴 하지만 행정구역상의 주인이기도 한 경기도 광주시와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하여 법규 내에서의 상생 방법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 조성된 ‘허브섬’으로 비롯되는 ‘차향 가득한 차 공원’이 될 수도 있고, 허브차로 대표되는 힐링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맑고 깨끗한 물로 상징되는 팔당호 상수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피고 지는 수풀 속에서의 인간과의 조우는 방치된 자유가 아닌 서로가 존중되는 자연의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공간일 때 팔당물안개공원에서 느꼈던 여러 불편함은 ‘체험’이라는 공감의 언어로 다가올 것이며 세계적인 명소로서도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광주시의 첫 프로젝트가 시작된 만큼 기대되고 이에 따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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