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남한산성의 핵심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행궁’을 면밀히 살펴보며 그곳에 내재된 수많은 사연을 몸소 깊이 느껴보고자 여느 때보다 이른 아침에 광주로 향했다. 마음을 다잡고 내딛는 발걸음이지만, 끝이 안 보이는 코로나19의 암울함마저 더해져서인지 일종의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수차례 월요일에 남한산성을 방문할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기에 일정을 조절하여 평일 아침에 방문했지만 여전히 행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알고 보니 요일과 관계없이 코로나19 때문에 개장이 안 되고 있다고 하니 형언할 수 없는 한줄기의 애잔함을 느끼게 된다.

행궁에서의 날씨는 쾌청해야 할 초가을의 서늘함이었지만, 이에 더해지는 주변의 정적은 불현듯 밀려드는 싸늘함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행궁이 안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아픔 때문이라고 극적인 유추를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은 극도의 혹한에 처해 있었다는 것은 작가 김훈의 '남한산성'을 통해 익히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소설 ‘남한산성’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남한산성 中에서

이 글을 떠올리며 싸늘한 초가을날의 행궁에 드리워진 깊은 정적 속에서 다시금 소설 속의 처절한 추위를 나도 모르게 절절히 유추해보고 있었다.

작가 김훈 소설 ‘남한산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에서도 엄청난 추위로 아주 두텁게 얼어붙은 강 위에서 예조 판서 김상헌이 강 나루터 뱃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추웠다는 것을 암시를 주는 장면인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추위를 견뎌야 했던 옛 시간은 인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기록 <대가가 강도로 떠났다가 되돌아오다. 양사가 김자점 등을 정죄하길 청하다>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말이 미끄러워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고 기록되니 당시 추위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된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별궁(別宮)이다. 1624년(인조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되었다. 별궁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임금이 머무르던 궁궐로써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까지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면서 역사의 한 무대로 기록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다. 전란 시 도성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갖춘 남한산성 행궁은 상궐, 하궐, 좌전, 인화관 등 전체 320여 칸에 이르렀으며 정무시설 뿐만 아니라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좌전)을 갖췄다. 한때 광주부 읍치(邑治: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또 6·25전쟁 등으로 대부분의 건물과 시설물이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던 곳을 1998년부터 학술 및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정비사업을 진행하여 상궐, 좌전 등 행궁의 주요 건물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당시 복원에 사용된 건축 자재들은 실제 남한산성에 남아있던 것들을 최대한 모아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행궁 복원 노력은 2014년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앞으로 이 행궁에 얽혀 있는 역사적 의미와 잠재된 애환을 심층적으로 더 많이 살펴보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향점도 다시금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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