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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선의 문화칼럼> 허난설헌과 여인별곡(女人別曲)의 조우(遭遇) - (下)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혀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너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가 지었다는 이 시조는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는 애달픈 여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인별곡(女人別曲)을 작곡하면서 노랫말을 결정할 때 난 이 가사를 3절 맨 끝에 배열하였다. 1절로 사용한 시조 ‘언약이 늦어가니’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노래이고 2절로 만든 ‘버들은 실이 되고’도 역시 아픈 사랑의 노래이다. 그럼에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맨 끝에 넣어 강조를 하고 대미(大尾)를 장식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 가장 절절하게 표현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난설헌을 생각하며 여인별곡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비록 스물일곱의 짧은 삶을 살았던 그녀지만 가슴 한편에는 어쩌면 그런 절절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허난설헌은 강릉에 있는 친정을 떠나 14살(다른 기록에는 15살로 나와 있기도 하다)에 경기도 광주로 시집을 왔다. 당시 남편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고는 하나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잠깐이었겠지만 허난설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고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친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삶은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살아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허난설헌 묘를 찾았던 다음날 강릉 생가터로 향했다.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생가터에 도착하니 허난설헌과 그의 동생 허균(許筠:1569~1618)을 기리는 기념관이 보였다. 그 뒤로 그녀가 어린 시절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냈을 생가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마치 전설 속의 공간 같은 느낌의 사랑채가 나타났다. 허난설헌이 실제로 사용했었다는 사랑채 우측 끝에 있는 방안에 허난설헌의 초상화가 놓여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우아하게 앉아있는 허난설헌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강릉 생가터에 놓여있는 허난설헌 초상화

지금은 기념관을 비롯하여 동상도 세워져 있고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는 곳이지만 혼인하기 전까지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을 마당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식으로, 동생으로, 누나로,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살았던 그 어떤 이름보다도 허난설헌 그녀를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시인이다. 여인 허난설헌은 어쩌면 그의 질곡의 삶을 승화시키는 예술가는 아니었을까? 강릉 초당동 그녀의 생가터에서 떠올리는 경기도 광주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힘들었던 시집살이와 남편과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 몰락해 가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움 자식 잃은 비통함 등으로 그녀의 삶은 단축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허난설헌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마지막이 된 <몽유광상산 夢遊廣桑山> 시 한 수를 남겼다. 

夢遊廣桑山詩(몽유광상산시:꿈 속에서 광상산을 노닐며 쓴 시)
(광상산;중국에 신선이 노닌다는 산)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청난기채난)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푸르게 젖어드는 아름다운 바다
푸른 난새는 기이하구나 (난새;중국 전설속의 새, 봉황새)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에
붉게 떨어지는 달은 차갑구나

*이 시는 전부 은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다. 다른 구절의 해석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크게 원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다듬었음을 밝혀둔다.

이 시의 정확한 해석은 찾기가 어렵다. 여러 곳을 뒤져도 해석이 어색한 부분이 많다. 특히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에서 3, 9는 왜 27로 해석이 되었는지 의견이 명확하지 않다. 그저 현재의 곱셈으로 3곱하기 9는 27일 것이라는, 그래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미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지 않았나 하는 자의적인 해석이 많다. 그 당시 곱셈을 저렇게 표기하였나 싶기도 하지만 필자는 왠지 그 의견에 따르고 싶다.

허난설헌은 시에서처럼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떠난 후 재혼했지만, 곧 이어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강릉에서 태어나 경기도 광주에서 살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묻혔다. 이곳에는 허난설헌과 그녀의 두 자녀 그리고 그녀의 남편 김성립과 안동김씨 일가의 묘가 함께 모여 있다.

그녀가 묻힌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부고속도로는 오늘도 변함없이 많은 차가 쉼 없이 달리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두 시간 만에 고향에 다다를 수 있는 현시대를 그녀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함께 하고 있는 광주 땅에서의 또 다른 환생으로, 어디선가 다시금 아름다운 시어로 우리 곁에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초가을 느낌의 투명한 햇빛에 더욱 진하게 빛을 발하던 허난설헌 묘의 초록빛 잔디는 에메랄드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허난설헌의 예술혼도 영롱한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고전의 미학으로 남길 기대해 본다.

광주뉴스  gin5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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