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한산성 철학산책

서정욱 광주뉴스 국장(철학박사)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폰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가 처음 사용한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말은 특정 시기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일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문화적 동질성을 의미한다.

또, 영국 마이케 왜르겔(Maike Oergel)교수는 자신의 저서, ‘시대정신은 어떻게 이념을 움직이는가’에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는데, 이는 ‘사회적 영향력’, ‘넓은 의미의 문화’, ‘일체감 형성’이라고 했다. 이런 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대정신은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확실하게 인과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정치세력, 즉 정당의 입장에서 선거라는 일련의 과정이다. 선거란 대중의 삶을 관통하는 감각과 생각을 포착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시대정신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얻는 정치적 의례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의 비전과 가치들은 서로 경합하고, 대중의 선택과 만나고 또 엇갈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이번 4·15 총선의 시대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제21대 총선에서 드러난 시대정신은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을 유권자들이 송두리째 바꿔 버린데 있다. 진보가 주류로 올라서고 보수가 비주류로 내려앉았다는 점이다.

유권자들은 2016년 촛불혁명,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그리고 2020년 총선까지 내리 4연승을 진보진영에 안겨주었다. 코로나 사태로 선거분위기가 바뀌었다는 핑계만으로 보수야당의 궤멸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정치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시대정신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보수는 이런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 ‘낡은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거리다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어쩌면 정치권에서 시대정신은 그간 ‘국정 교과서(?)’에 가까울 정도로 통용되어 왔다. 그런데도 보수야당의 지도부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방식으로 대응한 탓에, 급기야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다못해 이번 선거에서는 특정 야당정치인을 향해 ‘국민밉상’, ‘찌질이’, ‘삼중 종교인’이라는 별칭까지 등장했다.

국민 대부분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시대정신을 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 시대정신은 지금까지 보통 선거에 의해 민심이 폭발하는 방식으로 표출 되어왔음에도 대한민국 야당만 간파하지 못했을까.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특정시기 시대정신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1987년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97년에는 외환위기 극복이었다. 그리하여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외쳤던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운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뒤 처음 치러진 2002년 대선에서는 새로운 정치였다. 낡은 체제 청산을 앞세운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웰빙(Well-being)바람과 함께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외쳤던, 건설회사 회장 출신 이명박이 당선되었다. 그다음 2017년 시대정신은 적폐청산과 평등 공정, 정의를 내세운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처럼 헤르더의 말대로 특정시기에 사회구성원들의 행위를 이끌어 내는 문화적 동질성이 시대정신으로 표출되는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시대정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권위주의 해체를 염원하는 젊은층과 중산층이 주도한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 있다. ‘미투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등 새로운 시대정신이 솟구치고 있다. 기업에서는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하고 대학에서 창업을 이야기하는 ‘뉴노멀(New Normal)’의 새로운 가치가 곳곳에서 등장한다. 젊은 세대, 수도권의 중도층이 갈망하는 시대정신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인은 민주화를 통해 철저히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인이 되었다. 세대, 소득, 지역에 따라 엄청나게 인식의 차이가 큰 다층적 사회가 되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외국인보다 더 먼 이방인으로 여긴다. 인식이 전혀 다른 세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과거의 획일화된 과제 보다는 다양해진 새로운 시대정신이 이미 등장했고. 이에 주목해야 한다. 이념보다는 실용을, 과거가 아닌 미래를, 그리고 기존질서에 순응보다는 민첩한 대응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정치도 ‘뉴노멀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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