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것은 길손만이 아닙니다. 오던 비도 멈추고 피던 꽃도 집니다. 포크레인 소리가 뜸하였습니다. 산이 조용해졌고 들에 분주한 손길이 있어도 고요합니다. 산을 휩쓸던 산나물의 봉고차와 사륜차도 뜸합니다. 좋은 것이 조용함입니다. 이게 나이를 먹은 증거인가 그런 생각입니다. 상징물같은 한 송이의 꽃이나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한 송이가 되는 것과 한 그루가 되는 과정으로서 꽃을 보고 나무를 봅니다. 참 사연이 많습니다. 지금의 고요는 자라거나 지는 과정으로서 느껴지고 맛보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 길목의 것들이 많습니다. 잊지 않고 민물고기를 보내 주는 분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다친 나와 부끄럽게도 또 다친 나를 기억해서 그가 솥을 걸어 달인 즙을 보냅니다. 우두커니 상머리에 앉은 내게 들리는 그의 오래된 소리였습니다. 머리가 백발입니다. 그녀는 그 때를 기억합니다. 짜증을 보이다가 그 때가 떠오르면 물러섭니다. 삼십 초반에 백발이 되었지요. 그녀를 병간호하는 것이 힘든 일이었습니다. 백발에는 이런 사연이 묻어 있습니다. 봄 산에 춘정입니다. 꽥꽥 애타게 소리 짖든 노루가 잠잠해졌습니다. 바로 저기에서 날뛰고 애타는 목소리를 내던 놈이었지요. 짝을 찾았나 봅니다. 자라고 사라지는 과정이 그놈의 육체 안에 춘정으로서 위치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인간에게 춘정이 있느냐 물어보는 것은 우문입니다.

이경달 객원지자
두 딸과 아버지와 엄마입니다. 엄마는 이틀 늦게 도착했습니다. 오기로 작정한 기간이 길었습니다. 그들이 오던 날도 조용하였습니다. 가는 그 날까지 조용하였습니다. 넓은 공간을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인위적으로 넓힌 것입니다.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의 사이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말이 어렴풋하게 의미를 가집니다. 딸은 이쪽 아버지는 저쪽입니다. 그 거리가 멀고 각자가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탓인지 사람들도 내내 조용하였습니다. 도회지에서 서로에게 틈을 주지 않았지요. 우리의 주거가 대체로 그러합니다. 내가 싫어했고 한편 편했던 아파트는 공간이 세밀하게 분활되는 이유가 부대낀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그는 집을 짓고 싶어했습니다. 공간을 분활했으면 좋겠다는 나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아내의 공간이 있으면 나의 공간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거실을 독점하는 것은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집에 있다고 전횡되는 것도 안됩니다. 같은 층의 방 나눔이, 벽이 다른 다른 건물이거나 아니면 층을 나누어서라도 하는 공간분활이 말의 대충이었습니다. 스웨덴을 지독한 개인주의가 일상화된 복지사회라고 합니다. 작은 방에서 한 이불을 사용하던 나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작은 아파트라도 층간 나눔이 안되면 물건을 잘 정리하면 비슷한 공간 분활이 될 것입니다.

   
▶(강가에서)
그들이 오는 날 하늘의 달이 눈썹 같고 쪽배 같았습니다. 쪽배. 가까운 곳에 나루가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배를 장대로 저어 건너 다녔습니다. 십 수년 전만 해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였고 세찬 여름 물에 썩어 매달려 있던 쪽배의 그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그런 날 마당에 등을 달았습니다. 저 아래 다리로 내려간 그들이 '연등이다'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애와 자유로운 딸은 단박에 아버지와 함께 알아차렸지만 엄마는 나중에야 그게 등이라고 알았다고 합니다. 참 상상력이 없어. 그녀가 그녀에게 한 말입니다. 그 연등은 수십 장으로 만들어진 유리 벽 내부에 전등을 단 것입니다. 많은 전등과 모양이 멀리 있는 그들에게 산속에 켜진 외등이고 연등처럼 보인 것입니다. 설치 예술을 보여 준다는 느낌으로 작업하였습니다. 팔각정에 불이 들어 옵니다. 전등을 여기 저기에 그러니 1층 2층 3층에 불을 크면 등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유리가 몇 겹인지라 전등불의 어느 색인지 알기 어렵지만 형형의 거대한 불빛입니다. 닮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기억 속에는 등에 대한 추억이 나름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내가 등을 켠 날 저 멀리서 그들은 불을 끄고 구경하였습니다. 그들 집안의 가로등을 끈 그들입니다.

   
▶(묘목에사 잎이-가죽나무)
몇 일을 머문 여자아이가 말을 건넸습니다. 집이 참 깨끗하다. 나는 마당을 쓸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서정연한 물건의 위치 때문에 그리 느낀 듯합니다. 풀이 있지만 다니는 길에는 베어져 있습니다. 집에 책장이 많습니다. 다들 다른 색깔이지만 줄지어 층지어 있습니다. 그 여자 아이는 그의 집과 방에 대한 생각이 어떨까요. 엄마는 바쁩니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바쁩니다. 낮 밤이 바뀌는 오랜 공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해 보았으면 하는 현재를 들었습니다. 많은 만화책과 뒹굴 거리면서 날을 보냈고 강가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강에 바람은 있어도 농기계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작은 감탄이 있었습니다. 조용하네요. 그들이 돌아와 피아노를 둥당거렸습니다. 그 소리를 누가 들을까요. 소리없는 봄날에 산속 외딴집에서 들리는 피아노소리입니다.

   
▶(새로만든 침상)
앓았던 꽃가루 알레르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약속한 침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요구대로 침상에서 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보기에 좋아야 하는 부차적인 요구도 만족되었습니다. 특히 바닥이 열려 있어서 공기가 '잘'통해야 한다는 것이 우선조건이었습니다. 메모해 두었던 칠판이 수없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물 밭으로 갔습니다. 오후에 저 밭의 신나무를 정리하자고 했지요. 씨앗이 떨어져 제법 굵어진 그 나무를 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누구의 말이 있습니다. 인생 속박이하지 마라. 좋은 열매 아래 놓여진 상하고 흠집 난 열매가 들어 있는 포장방법입니다. 봄날의 씨앗에서 처음부터 하지 않을 작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무에 그 열매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 다른 것이 인간의 사이에 벌어진 틈이겠지요. 틈은 단지 틈이라는 분도 계시지만 차이가 분명합니다. 낫도 몇 자루 산 날입니다.

-봉화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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