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극회의 여섯번째 창작극 <격정만리>를 보고-

 연극은 사람이 때때로 느끼는 이상한 정신과 묘한 감정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관객을 울게 하고 한 시절을 추억하게 한다. 또한 비극과 희극의 정점에서 관객을 연민과 공포로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한다.
 
 호흡은 살아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좀더 색다른 호흡을 느끼고 싶거든 가끔 연극을 보라.

 봄이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햇볕이 파발극회 앞마당에 크리스탈처럼 떨어졌다. 연극을 보기 위해 모여든 발길은 토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재촉했다. 몇몇 사람은 담배를 길게 피워 물고 파발극회 담벼락에 커튼처럼 드리워진  ‘격정만리’ 현수막을 바라보고 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담배 연기에서는 젊은 시절, 저 사람들만이 가졌을 공연장의 추억과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진지한 열정이 뿜어 나온다. 나는 저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따뜻하게 누리며 파발극회의 지하계단을 한칸 한 칸 내려갔다. 내게도 열정 하나로 공연장 앞에서 서성였던 무수한 젊은날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추억이 봄날의 꽃씨처럼 자꾸 흩날린다. 
 

이정윤(본명:이돈미) 안성출생.2008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어둠속에 묻혀 있는 객석. 나는 선뜻 비집고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색다른 뜨거움이 일었다. 몇몇의 관객은 이미 객석에 있고 한 무리의 학생들이 주고 받는 말소리가 싱싱하다.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마지막 리허설을 하고 있다. 나는 소설가 한상윤 선생, 김미화 선생과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배우들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어린 학생들이 나누어 준 ‘격정만리’ 홍보 팜플릿을 천천히 넘기며 출연 배우들의 실제 얼굴과 극중 배역 인물의 성격을 번갈아 눈에 익혔다. 극중 배역을 이해하려면 실제 배우의 이미지 확보는 관객 스스로 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배우가 배역만 잘 소화하면 될 일이지 실제 인상이 무슨 상관이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가 가진 천의 얼굴을 잘 이해하려면 실제 얼굴속에 숨겨진 진짜 배역의 얼굴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관객은 무대를 보면서 배우와 호흡하지만 배우는 무대와 관객과 실제의 자신과 배역을 감당하며 무대에 선다. 그래서 배우들은 뜨거운 사랑과 갈채와 비난도 함께 받는다. 나는 마치 내 피붙이인양, 팜플릿 속, 스텝들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무대에 불이 켜진다. 거인이 한 사람 서 있다. 파발극회 대표 이기복 선생이다. 대극장에서 펼쳐내야 할 ‘격정만리’를 소극장에서 그려내는 현실에 아픔을 느낀 탓인지 소극장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기복 선생의 어조는 사뭇 진지했다. 소극장이야말로 관객은 배우들의 호흡을 직접 느낄 수 있고 배우 또한 관객과 호흡함으로써 살아 있는 무대와 연기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격정만리’는 32여명의 배우가 참여 하는 연극이라 움직임이 큰 만큼, 소극장에서 공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니 애정으로 보아달라는 인사말을 뒤로 하고 선생은 노란 불빛속으로 사라졌다. 열정을 다한 사람의 뒷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이기복 선생이 그려 낼 그만의 독특한 연출을 기대하며 마음과 눈을 무대로 모았다.
‘격정만리’는 1920년부터 1950년까지 격동의 세월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이념의 희생물이 된 광대들의 처절한 생애와 사랑, 예술을 그린 이기복 선생의 여섯번째 창작극이다.

집중조명을 아래 한 배우가 서있다. 연극 ‘격정만리’는 여배우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었다. 조용하고 심도 있는 연극의 시작은 나를 압도 했다. 검은 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배우들이 무대에 가득찼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무대도 함께 움직였다. 이기복 선생의 우려대로 작은 무대가 많은 배우를 소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이기복 선생은 좁은 무대의 문제점을 ‘배우들의 연기력’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로 무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무대가 주는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관객들이 자연히 배우에게 몰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대를 가장 진실하고 뜨거운 몸짓으로 그려내며 질기게 살아낸 광대들의 호흡이 2시간 동안 천천히 펼쳐졌다. 광대들의 눈물겨운 호흡은 멈추었지만 그들이 기록한 호흡의 역사가 한 사람의 연극 순교자 이기복 선생에 의해 재현되는 순간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한 사람의 순교자는 나오기 마련이며 모든 이치는 한 사람의 순교자에 의해 피어나는 것이다.

연극 ‘격정만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념의 선택을 강요 받은 한 연극인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시대가 보여준 비극 앞에 관객들은 울었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관객과 무대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나는 감히 이기복 선생의 연극을 ‘관객의 심안을 끌어 내는 눈물의 연극’이라고 정의 한다. 배우들을 위한 갈채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모두가 가버린 공연장, 나는 객석에서 내려와 마치 배우가 된 것처럼 무대에 서 본다. 배우들의 호흡을 삼킨다. 나는 무대를 내려 오면서 다시 한번 호흡을 길게 했다. 나는 다시 객석에 앉는다. 역사속에 사라져간 광대들과, 그들을 노래한 파발극회 배우들, 관객이 이루어낸 공연장을 가슴에 안아 본다.

다시 이 어두운 지하 파발극회에서는 대사를 외우는 어린 배우들이 햇빛을 받지 못한 채 한가지 호흡만을 위하여 밤늦도록 불을 밝힐 것이다. 나는 열정을 가진 연극학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한탄하며 계단을 올라 왔다.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어둠이 내 발밑까지 쳐들어 왔다. 모두 가버린 주차장. 차들도, 사람들도 자신만의 호흡을 위하여 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저기 저 어둠속에 이제까지 미워했던 것들을 다 버려도 좋을 만큼 행복한 충족감에 빠져 발길을 힘차게 옮긴다.

이정윤(본명:이돈미) 안성출생.2008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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