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때가 있지 않고 장소가 없습니다. 많은 눈입니다. 봄 산에 눈 내리면 잊어야 할 님이 가슴에서 메아리친다고 하지요. 내리는 눈에 까마귀 몇 마리 무리를 지어 요란스럽습니다. 한식을 두고 내린 눈에 무덤은 포근할까요. 산자가 죽은 자에게 예를 하는 그 날을 앞에 두고, 눈 내리는 아침에 까마귀의 높아진 음을 듣습니다. 산의 무덤이 포근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눈 내리는 아침이 포근하기 때문입니다. 단선적인 생각을 내가 합니다. 이 단순함이 죽은 자에게나 산자에게 연결되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지요. 지난 겨울 눈이 적었다는 짜증을 무색케하는 많은 봄 눈도 곧 녹을 것입니다. 죽음은 상실입니다. 눈은 죽음을 덮고 있습니다. 가난도 상실입니다. 눈이 산에만 내리고 있습니다. 잊어야 하는 님도 상실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덮지 못하는 나의 마음 한 자락이라는 말을 담아 누가 연락을 했습니다. 아프지 말고 살아야지. 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득하여도 단순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 어디가 아픈 것이고 무엇 때문에 아픈 것인가요.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
난, 면허가 없습니다. 젊은 그 때 '콩코드'라는 비싸고 잘 나가는 차가 있었습니다. 그 차를 사기 위해 고심한 적이 있었지요. 많은 이들은 내가 '카레이서'가 되지 않을까 추측했지만 몇 고비를 넘기니 면허가 없습니다.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면 남자 여자 누구도 가지고 있는 면허가 나만 없습니다. 이십 년 가차운 그 때에 무면허 운전을 했습니다. 저 아래 언덕에서 차를 가져 와야 할 때라든가, 좁은 장소에 곡예운전이 필요하면 대신 핸들을 잡곤 했지만 그 것도 오래 전에 끝이었습니다. 그럴 일이 없어졌고 신문에서 본 판례에 따라 핸들 그 자체를 잡지 않습니다. 집단으로 면허를 따든 때나 면허가 밥벌이인 때도 있었고 취미이고 바쁜 일에 필수였지만, 면허가 없습니다. 대중교통입니다. 도회지에 나가면 버스를 탈 때의 불편은 있습니다. 전철은 편합니다. 그리고 익숙합니다. 1호선을 경험하였지요. 그 때 4호선이 개통된 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세월을 짐작합니다. 요즘 휴대용 네비게이션이 있는 시대지만 내가 운전석 옆자리에 타면 길 안내는 도맡았습니다. 그들의 운전이 짜증나면 내려서 걸어갈 방법을 찾거나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면허 없이 걷는 것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 때 면허는 주류로 편입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봄눈-서재 처마 작은 물고기)
산골의 그들을 보면 참 딱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현존재가 아닌 전존재가 작동하고 있다는 의구심입니다. 전에 내가 배우지 못했고 전에 배우지 못한 것이 한자리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듯한 태도입니다. 각 대학에서도 폐과가 되는 곳이 여럿 있지요. 이유는 현재로서 '밥 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불안입니다. 내 때는 대학 졸업은 취직의 보증수표였고, 가난한 장남이라도 결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대학이 인플레이션 된 것입니다. 대학의 과가 사라지는 데에 있어, 학문을 운운하지만 대학에서 학문이 몸부림치고 꿈틀거리고 방향성을 가지고 비판과 저항을 보였다는 생각은 내게 없습니다. 그러니 산골 둘레를 보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도회지에서 자취를 하고 도회지로 등록금을 보내고 도회지로 책값을 보내는 이 내용이 '보내는 자가 스스로에게 무례하다'는 생각입니다.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 고관절이 나간 엄마와 무릎을 절고 있는 아버지의 일상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입니다. 남의 집 일 나간 적이 있습니다. 돈 만지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에도 일감이 있으면 나가는 그들입니다. 도회지로의 유학. 농가 부채를 부풀리는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겠지요. 학교 서열이 권력이고 권력은 본디 치장과 포장을 근간으로 합니다. 아카데미라는 말자체가 권력입니다. 이를 등한시하거나 아니면 모르는 탓으로 무엇을 당연하게 여긴 가혹한 현실입니다.

면허와 학벌로 칭해지는 '문명'이 극성을 부린 것은 어제 오늘은 아닙니다. 중학교 입시시험이 그 때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상식이 되어버린 학벌입니다. 면허가 그 문명의 축을 이루고 있음은 우리의 제도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문명에 대항으로서 '문화'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 오를까요. 길들여지는 것이 문명이라는 것이라면 거스르는 것이 문화가 되겠지요. 그러니 문명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추악'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다양한 상대성이 '문화'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문명과 야만은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물건의 다름 이름입니다. 문화는 모색이어야 하는데 이것도 내게는 희미합니다. 어떤 물건에도 문명이라는 요소와 문화라는 요소가 더불어 섞여 있습니다. 이게 그럴듯하겠지요. 이것은 불편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바탕이겠지요. 세상이 불편해졌습니다. 자꾸 극복해야 되고 또 생각해야 할 대상들이 무수히 늘어 나고 있는 현실 때문이겠지요. 고달프다. 들리는 소리입니다.

또 연락입니다. 죽은 자의 무덤으로 산자들이 죽은 자를 위한 듯 음식을 준비하고 그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한식을 표상으로 내건 그 뒷면에는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을까요. 뭔가 그럴듯한 아래로 숨겨져 있는 그것은 저 봄눈이 녹듯 녹는다는 자연의 진리만을 의지하고 기다리는 것인가요. 이런 날 우리의 생각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그런 내가 가지는 이중성이라는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요. 진정 문명의 대안으로서 '문화'를 모색하고 있는지요. 그러면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궁리가 무엇인지 아마 다양하고 심층적인 논의가 혼자라도 필요할 것입니다. 창문을 걸어 잠그고 비오는 밤에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소리를 벗삼든 그 때를 떠 올리면서 가역될 수 없는 시간과 가역될 수 있는 시간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봄눈-집으로 오는 길)
내게 전화한 그는 아파 몇 일을 앓아 누었다고 했지요. 아픈 그에게도 봄날입니다. 해가 진 마당은 어수선합니다. 하늘에 낀 구름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만큼 내가 정밀한가 그런 물음도 가집니다. 누가 두고 간 기타가 방안에 덩그러니 있습니다. 누구를 불러 노래를 부를까요. 그 노래 속에 등장하는 오리나무의 저 숲이 베어진 것을 몇 해전에 보았는데 어찌 되었는지요. 다시 가 보지 못했습니다.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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