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촌 편지>

 마당에 산 그림자입니다.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까지가 산 아닌지 희미하지만 그림자입니다. 희미한 산으로 안개는 등선을 타고 나는 난간에 서 있습니다. 계절이 바뀐 증거입니다. 늦은 아침입니다. 아침을 나는 새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낮에 들리는 까마귀 소리는 시끄러웠습니다. 구름이 짙어졌습니다. 짙어진 구름에 산은 제 그림자를 지웠습니다. 어둡구나. 그래도 간간이 구름이 열리고 드러내는 빛만큼 산도 제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빛은 그림자를 이웃으로 하고 그림자는 빛의 뿌리이기도 하다는 고전적이고 세속적인 말이 있지요. 자주 고개 끄덕여지는 내용입니다. 이리 생각하는 나와 달리 구름은 제 가는 대로 갑니다. 이런 날 무엇을 할까요. 할 일이라도 있기나 한 것인가요. 여러 가지 꽃을 따서 차를 만들고 먼 곳에서 올 누구를 생각하여 막걸리를 담고 그리고 마당에 빨래를 너는 그녀입니다. 그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할까요. 무슨 일을 나는 하고싶은가요. 구름이 깊은 탓이라 누가 말을 걸어도 음 그렇겠지 그런 말이었지만 계절은 내게 무엇인가요.

이경달 객원기자
신화. 일전에 신화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어떤 분의 정색을 들었습니다. 신화를 사실로 생각할 때 그건 잔인한 폭력이라는 것이었지요. 나치스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의 말은 책에서 본 것과 닮은 부분이 있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 한 분이 있었습니다. 목사입니다. 학부 때의 전공이 신화 이런 쪽이었는데 갑자기 신없이 말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종교와 느슨한 과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흔히 보는 그 모습이었습니다. 탓의 원인과 결과를 그의 종교로 연결시켰습니다. 둘레의 어떤 여자분이 지나치다는 말에 약간 물러서기는 했지요.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이런 느낌을 내가 갖습니다. 그러니 빛과 신화의 영웅과 동일시하는 그들이 그들의 동일한 모습인 그림자를 외면하고 공격하는 인상입니다. 칼 융. 과학의 발달로 그의 작위적인 인과론이 자취를 감추었고 또 꿈꾼 자를 위로하는 그의 서구적인 해몽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끼워 맞추는 신화니 뭐니 하는 모습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것이 우리사회에 위험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꽃 잎들)

그림자. 빛의 반대편이고 열등하고 세련되지 못한 부분입니다. 빛과 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지만 빛으로부터 구박을 받습니다. 돌이키고 싶지 않는 것이고 악몽이고 떠나 가고픈 자리입니다. 그림자 그늘.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유아적입니다. 그들 때문이다. 그들이 그랬다. 그들이 틀렸다. 그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난무하고 있습니다. 조발성 치매의 증상이고 사회를 휘감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자기로' 돌아 오는 것이 세상에 대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IMF 후에 정부의 공적 자금으로 살아난 그들과 달리 역 둘레를 배회하는 노숙자에게서 자기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다른 고등종교는 이 모습을 가질 것으로 상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킬 수 없는 험한 말들의 그들은 어떤가요. 게임의 공정한 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발성 치매의 증상은 탓이 그들인 것입니다. 벗어나는 것이 화살을 내게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치스를 기억합니다. 니벨룽겐의 반지가 회자되고 위대한 아리안 족의 신화와 그들을 동일시하는 대가로 죽은 600만의 집시와 600만의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살던 곳을 구성하던 신화의 주인공은 그들 편에 있었지만 그림자로서 떠도는 집시도 신화였음을 애써 외면하고 살육한 것입니다.

양극화. 이건 잘 사는 그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로서 짙게 넓게 다가온 가난입니다.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했던 육 칠십년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시대를 가까운 분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가난은 우리 문화의 동전의 양면같은 현상입니다. 부동산 투기나 주식조작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분들은 이런 가난의 쓰라림이 뇌 속에 남은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배척하는 현실은 곧, 나의 부분인 그림자를 배척하고 지우는 작업입니다. 말바꾸기와 얼토당토 하지도  않는 논리를 보면서 깊어지는 그림자입니다. 미국의 선진 금융기법의 이면에 도사린 위험성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찌 무한정으로 팽창하는 경제를 생각할 수 있나요. 쪼개고 쪼개고 덧씌우는 것이 파생상품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포장이 내용물을 압도하는 가공의 상품의 그늘이 뭘까요. 공적 자금으로 살아남은 기업 둘레로 거리를 배회하는 한때 가장의 무리와 그 무리들이 풍기는 냄새입니다. 노인복지도 같은 맥락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머물고 낮은 곳을 배회해야할 지금에 '신비한 신화의 단면'이 작동하고 있다는 불안입니다. 폭력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봅니다.

도깨비. 용. 산신령. 접신과 빙의. 신화적 상상력이 상상의 세계를 벗어날 때입니다. 이야기 속의 도깨비이고 산신령이지만 그것에 매달리고 논리와 이론을 제공하고 돈과 권력과 결탁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습니다. 야생의 사회에서 주술사는 무엇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마을과 떨어진 숲에서 대개 혼자 살았습니다. 그가 할 일은 대가없이 마을에 도움을 베푸는 것이었지요. 주술사가 족장이나 추장과 겸임할 때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전쟁입니다. 전쟁은 집중된 권력이 낳습니다. 주술사는 혼자 살았고 혼자 숲에서 생활을 영위했으며 마을로부터 보상이 필요없었습니다. 주술과 기도의 신전에는 추한 곳이 없었습니다. 낮은 곳도 없었습니다. 작고 냄새나고 낮은 곳이라도 위대하였습니다. 신이 왕림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술사가 되기 위한 과정은 험난하였습니다. 신의 왕림은 높고 크고 밝은 자리라는 생각이 본디 없었습니다. 왕림하는 그 자리가 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작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그들이 쪼들리는 현실에서 크고 넓고 환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늘이 배척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햝아 먹던 사탕에서 깨어서 먹고 또 입이 꽉차도록 쑤셔 넣는 외길에 빠졌습니다. 이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상을 벗어난 것입니다. 집단 광기의 시대에 들어서지 않을까요. 기우였으면 합니다. 집단으로 조발성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의구심입니다.

강제하는 것. 카톨릭의 교리에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신화로 받아 들였습니다. 여러 곳에서 존재하는 신화와 닮은 비슷한 것으로 재미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리로서 강제하는 현실을 봅니다. 비슷한 것을 개신교인들에게 몇 번이나 물어 보았습니다. 들림받아서 하늘로 왜 가고 싶은가요. 상당한 저항이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강제하는 극으로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가면 된다는 결론이었지요. 그들은 자기가 없었습니다. 주체의 탄생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나로서는 괴이한 현실을 넘어 맹목이 강제되는 환영과 환청의 세계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누가 가는 천국이라는 말에 자신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마 그의 천국은 살아서 획득했고 또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그림자를 도외시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의 천국은 묘한 논리로서 자기위안을 삼는 '단어와 소리'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자기 그림자를 직시하는 것이겠지요. 자기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그림자를 만드는 빛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그것이 나임을 아는 것이겠지요. 무엇도 버리지 않고 보다듬는 것이겠지요.

가끔 봅니다. 죽어도 옳은 그들입니다. 그림자를 도외시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옳다는 것을 굽히지 않습니다. 논리라는 것은 다양합니다. 고함을 지르는 것도 그것이고 단어 두어 개를 반복하는 것도 그것이고 인신공격을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조발성 치매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의 기로는 희미한 이것 저것에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을 변모시켜 정당화시키지 않고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림자는 우리가 있는 이상 존재하는 실물임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실물경제 속에 사람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악의 분열이 단순히 종교적이지 만은 않습니다. 광풍의 사회에서 광풍은 대개 이런 선이고 나머지는 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웃기는 소리로 치부하기에는 광풍의 칼날에 떨어지는 꽃잎이 너무 많고 갈갈이 찢겨지는 모습이 참담합니다. 무작정 편드는 집단의 근간이 이런 그림자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결국은 자기 살을 베는 것이고 자기 삶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그림자 없는 빛은 없습니다. 악마의 가슴에 찌른 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칼이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누구를 보았습니다. 늘 안타깝게 훌륭했던 내력입니다. 좋은 스승과 가문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의 집을 알고 있습니다. 가문이랄 것도 없는 가난한 변두리입니다. 나는 그의 스승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둘레의 분은 그를 아무도 제자로 여기지 않지만 스스로 누구를 나의 스승이라는 말을 하고 다닌답니다. 아마 그림자를 부정하는 삶이 이런 것이겠지요. 일전에 코미디 프로를 보았습니다. 이 그림자를 상품화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는 상업주의가 아닌 그림자의 상업성에 눈을 뜬 것이겠지요. 아마 그분은 다정한 피가 차가운 피부 아래에 흐른다는 명징함을 깨친 듯합니다. 그림자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이 가을에 할 만한 일이 아닌가요. 그림자를 만들어 낸 것은 나라는 것과 나는 그림자와 뗄 수 없다는 것과 또 나는 지향하는 것이 빛이지만 그림자 없는 빛이 없고 또 빛으로서의 밝기는 그림자에 비추어 명확해 진다는 것입니다. 나 아닌 그와의 차이가 분명 존재하지만 같은 욕망의 뿌리에서 자란 쌍둥이임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힘들겠지요. 부유함의 상징이 깨끗함과 단정함 그리고 질서와 좋은 향기로 대체되기 때문입니다.

   
▶(산국-같은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지요)

해가 뜨면 마당을 지나는 산 그림자는 더욱 선명합니다. 선명한 그림자는 시원한 여름이 되지만 추운 겨울에 짐입니다. 세상 어디 변하지 않고 흐르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촛불이 흐르고 사랑도 식고 또 모든 이를 적으로 삼던 그도 흐릅니다. 아이가 멀리 떨어진 실감을 집의 그녀가 합니다. 그립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변화가 왔다라는 실감입니다. 변화에는 세월이 있습니다. 얼굴에 세월이 보인 날입니다.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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