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나라가 단명(短命)하게 된 데에는 3차에 걸친 무리한 고구려 정벌에 있었지만 그 못지않은 원인 중에 하나가 수양제가 2차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일어났던 양현감의 반란을 들 수 있다.

양현감은 고구려 정벌군 보급물자 운송의 최고 책임자였는데, 그는 반란군을 일으킴과 동시에 핵심 참모로 그의 어릴적 친구 이밀(李密)을 끌어들였다.

언젠가 양현감과 이밀 사이에 이런 예화가 있었다고 한다.
평소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이밀이 양현감에게 무슨 이야기 끝에 말했다.

“양군이 결전을 할 때, 진의 맨 앞에 서서 대갈일성으로 적을 떨게 하는 데는 나보다 그대가 뛰어나오. 하지만 천하의 뛰어난 인재와 준걸을 수족처럼 부려 각각 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는 실례지만 내가 나을 것이오.”

그러자 양현감은 별 이의를 달지 않고 웃으며 수긍했다.
그런 사이고 보니 양현감이 반란의 기치를 올리자 말자 이밀을 참모로 끌어들인 건 당연하다하겠다.

하지만 양현감은 막상 이밀을 참모로 삼아놓고 그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밀이 최하책이라고 말한 계책을 최상책이라고 우기고 그대로 하다가 나라만 어지럽게 만들어놓고 결국 진압군에게 패하여 참수되고 말았다.

이밀도 양현감과 함께 사로잡혔지만 그는 호송 도중 요행이 탈출하여 목숨을 건지게 되었는데, 그는 신분을 속이고 숨어살다가 산적 두목 적양(翟讓)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그는 여러 산적 두목을 사귀고 있었지만 적양이 가장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밑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가 적양 참모를 맡게 되자 적양이 이끄는 산적은 얼마가지 않아 주변 산적무리를 죄다 통합하는 엄청난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쯤 되자 적양은 이밀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남을 알고 이밀을 수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2인자로 스스로 내려앉았다. 부하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스스로 자신보다 윗자리에 앉히기는 쉽지 않은데 그렇게 한 것을 보면 적양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수령에 오른 이밀은 세력을 계속 키워 천하를 거의 삼킬 만큼 되었다. 당시 이연(당태조)과 이세민(당태종) 부자도 황제를 꿈꾸고 거병했지만 이밀의 군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총명하기로 유명한 이밀도 황제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력이 커지자 슬슬 적양을 거추장스럽게 여겼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수령으로 추대해준 예우로 적양을 총리로 삼고 있지만 언제 무슨 빌미로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사실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진 데는 적양 측근들의 잘못이 있긴 했다. 측근들은

“원래 당신이 두목이었으므로 이밀을 축출하고 천하를 취하십시오.”

하고 충동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양은

“그가(이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조그만 산적 두목에 불과 했을 것이다.”

하며 오히려 측근을 나무랐다. 그런데 그런 측근의 말이 이밀 측근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밀은 이 참에 후환을 없애자는 심사로 적양과 그 측근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적양을 거세하고 나자 이밀의 군대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밀 군대 대부분 장수들이 산적 두목 출신들인데 이밀이 적양도 죽일 정도면 자기들은 언제 이용만 당하고 죽을지 모른다는 불신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장수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이밀은 결국 이연에게 목이 베이고 말았다. 총명하긴 했지만 담대함과 포용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세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이연과 이세민 부자에게 천하를 내주고 만 것이다.

요즘 과거사 청산이다 정체성이다 해서 정치권이 시끄러운 모양이다. 특히 한나라당의 내분양상이 심각한 듯 하다. 급기야 박근혜 대표는 비주류 대표격인 이모 문모 의원에게 탈당해줄 것을 노골적으로 표명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딱하다.

내 입장과 내 뜻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잘라내고 배척하는 풍토를 가진 조직치고 잘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1961년 5월 생
월간 녹색지대 前 편집장 * 역사·무협 소설가
장편 「황하(3권)」 「刀劍天下(6권)」등이 있고
단편 「누렁이」「보금자리」등이 있다.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