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백성이 가장 귀하고,사직을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본정치의 대계를 세운 정도전! 14세기 고려, 밖으로는 원나라의 속국으로서 독립국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바람 잘 날 없었으며 안으로는 악정(惡政)을 일삼고 음란한 행위만 되풀이 하는 왕들에 의해 도탄의 지경에 빠져 있었다.

천민인 외가 때문에 관료의 길이 막힌 정도전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아예 ‘판을 새로 짜는’실험을 구상한다. 혁명을 준비한 것이다. 함주(함경도)까지 찾아가 이성계를 혁명파트너로 만들고 ‘위화도 회군’을 구상하여 역사의 흐름을 되돌려 놓았다. 마침내 새나라 조선을 세운 것이다. 그는 혁명에 성공하고도 왕이 아닌 신하로 남을 것을 자처했다.

‘백성이 가장귀하고, 사직은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는 성리학의 기본이념에 따라, 백성이 배부르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안정을 원하는 이성계와 왕에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이방원 사이에서 미완에 그치고 만다. 아버지 자리를 탐내는 아들과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이에서 정도정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정도전과 함께 격동의 여말선초를 살았던 외로운 천재와 영웅들, 정몽주, 이색, 하륜, 공민왕, 최영 등은 어떤 모습으로 역사를 이끌어 갔는가? 500여년을 이끌어온 고려 말의 정색은 왜침과 부패의 몰락을 걷고 있었다.

성리학을 이끈 이색의 제자 정몽주, 하륜, 이승인, 정도전 동문수학한 선후배로 당시의 시대상에 주변을 맴돌던 이색의 수제자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 말의 상황은 민초들에게는 도탄의 시간이었다. 토지수탈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길거리에 나앉고 굶어죽는 주검들이 늘비했다. 정도전은 불과 16살 나이에 균전법으로 부호들이 갖고 있는 토지를 나라에서 모두 거두어 농민의 숫자에 맞춰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역설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아버지 정승겸이 파직을 당한다. 감히 당시에 비춰 금기사항을 내포한 것이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운이 다한 고려를 혁명으로 백성이 백성답게 사는 나라를 구상한다. 죽고 죽이는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시대에서 우왕의 장인인 최영은 살기위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계획한다. 이를 예측한 정도전은 이성계에서 위화도회군의 사대 불가론으로 개경으로 들어와 최영을 제거한다. 왕의 측근에 있기에 혁명의 걸림돌이었던 최영은 청렴결백했고 고려를 지킨 최고의 명장이었다.

죽이는 이성계도 존경의 눈물을 흘렸고 죽음을 당한 최영역시 떳떳했다.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평소에 우애와 전쟁 속에서 나라를 지켰던 의를 같이했던 장수였다. 이방원 역시 아버지 이성계와 정도전의 혁명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성계가 둘째부인의 아들에게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을 통해 아버지를 죽이려 했고 이성계역시 정도전을 통해 아들을 제거하려했다면 역사의 아이러니이랄까. 권력의 구조는 부자의 천륜도 저버린 것일까? 정도전은 왕의 책사만이 아니었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공사가 한창일 때 직접 공사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각 궁궐마다 명칭을 부치는데 그 뜻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경복궁은 군자의 만년을 빛나는 복을 빈다.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의 태평업을 누리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한다는 뜻이었고, 정도전이 지어서 남긴 전각과 문루의 이름 중에서 놀라게 하는 것은 종묘의 대문을 창엽문이라고 명명했는데 풀이하면 창엽문의 창(蒼)을 해자하면 이, 팔, 군의 합자임으로 ‘스물여덟 임금’이라는 뜻이 된다. 엽(葉)을 해자하면 이, 세, 십, 팔 이 됨으로 이는 28세 라는 뜻이 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빈으로 간택 되었던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위패가 종묘에 봉안됨으로써 위패의 봉안은 모두 끝났는데 거기에 봉안된 임금이 28위요 28세로 조선왕조의 세계가 끝났다면 문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은 이미 6백여년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서오경에 통달을 하고 고금의 역사에 밝았던 정도전은 조선의 흥망성쇠를 가늠하고 있었을까? 두 권으로 이뤄진 책이었지만 한 숨에 읽을 만큼 진지한 내용에 흠뻑 빠지게 한다.

원나라와 홍건족의 침략, 남쪽으로 왜침으로 줄타기외교와 열악했던 국방, 백성들은 굶주림에 지치고 권력의 주변에서는 음모와 역모가 난무했던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건국시기는 우리역사에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었다. 역사를 통해 혼란과 변화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세에서 역사의 거울을 돌아보는 뜻 깊은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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