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촌편지>이경달
눈이 내렸다.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린다. 나무의 틈과 덤불의 깊은 틈에 눈이 내렸다. 새들은 어이 되었는가. 노루 발자국이다. 저기에서 바스락대던 노루가 여기까지 내려왔는가. 매가 난다. 두 마리가 눈 내리는 공간에서 천천히 원을 그린다. 각기 다른 높이다. 눈 위에 뜬금없는 핏자국이 보였는데 저놈 탓인가. 생각이었다. 눈을 치웠다. 눈을 치웠다. 많은 눈을 치웠다. 그리고 눈을 치운다. 지난밤 고요를 가져다 준 눈이다. 산에 눈이 내리면 아무 소리가 없다. 참 그리운 소리 없는 소리다.
내렸다.
그리고 눈이 내린다.
매가 난다. 원을 그리면서 각기의 높이로 매가
난다.
눈 내리는 지난밤 그리운 소리를 들었다.
외치는
소리 없는 소리였다.
그 때 나는 그의 방에 있었다. 방은 벽으로 닫힌 공간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목소리는 변했다. 안부를 묻고자 들어간 방에 약품 냄새와 대소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의례적인 말을 건넸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지난날이 꿈같아'. 그리곤 '먹갈치를 먹고 싶다'고 했다. 헤어졌다. 나는 나대로 일이 있다. 세상은 일이 잔뜩 널려 있는 그런 곳이다. 다시 들른 저녁의 그의 거처에는 그의 죽음이 있었다. 다양하게 남긴 말에 유언이 있다. 노인은 고집이 세다. 노인은 말귀에 어둡다. 노인에게 죽는다는 것은 좌절이다. 누구도 자기죽음을 당연시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그는 병상에서 떠올린 지난 모든 세월이 일주일도 되지 않음을 보았는가. 꿈틀거리는 내부와 언어가 결합되어 크고 잘생겼고 은색에 검은 빛이 감도는 그 고기이름을 말하고 먹고 싶다고 하였는가.
그 때 나의 그에게로 갔다.
그의 방은 소독약과 배변의 냄새로 벽 지워져 있었다.
그는 말을 남겼다.
'지난 날이 일주일의 추억이야.
아, 먹갈치가 먹고 싶다.'
그는 죽음을 당연시하였을까.
남긴 말은
고집 센 그의 내부에서 완고하게 일어선 언어의 파편이고, 무작위적인 결합인가.
무엇이 언어와 그리 결합하였는가.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아이들. 고함치는 어른들. 끝없는 이유의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무의식이다. 통제되지 않고 분출되고 그것과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엉킨 덩어리의 혼란상태가 그저 다가와 드러난 것이다. 이런 분들과 달리 죽음을 몇 시간 앞에 두고 말을 던지는 그 행위는 무엇인가. 먹고 싶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 의식이 투명해지면 먹고 싶다는 것은 없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도 없다. 무엇을 특별히 남기거나 안타까운 것도 희미하다. 그가 남긴 말, 유언은 무엇이었는가. 따를 수도 없고 들어도 뭐가 뭔지를 모르는 말을 그는 한 것이다.
글자에 힘들어하는 아이들. 고함치는 어른과 잘 삐치는 사람들.
그들은 무의식의 바다를 공유한다.
그 바다는 불쑥 솟았다가 문득 사라지고 그리고 흔적을 남긴다.
흔적은 힘들다는 말과 당황스러움이다.
그의 유언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말. 말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인가. 말은 어디로 향하는가. 말은 계층적이고 다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은 '유언'에 어이 해당되는가. 그는 그 말을 사방팔방도 위도 아래도 아닌 어느 곳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것이었는가. 그 샘은 오래 전 어디에서 내린 비의 흔적이겠지. 오래 전의 지금이 그가 한 말인가. 그러면 그의 말은 아름다운 풍경화다. 목가의 느낌과 냄새 그리고 오손도손한 햇살의 한때를 그린 그림이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비에 젖지 않고 갑자기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실의 그림인 것이다. 그는 내게 유화로 그린 풍경화 한편을 남겨 준 것이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앞과 뒤도 없는 샘에서 길어온 물.
그의 유언도 그렇게 흘러나온 물이 어디로 흐르는 것과 닮았으리라.
그의 말은 그런 샘물 같은 향수를 담고 있는
기름 냄새가 풍기는 풍경화였다.
햇살의 한때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마른풀과 늘 볼 수 있는 이 풍경은
거실의 그림이기도 했다.
남긴 말은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풍경화였다.
남겨진 깨끗한 그의 양복과 넥타이. 그 때는 신식이었겠지만 때가 지났다. 낡은 흑백사진이다. 가진 것은 흑백사진처럼 바랬지만 말은 기름 냄새가 풍기는 유화였다. 많은 풍경화는 보지 않고 그냥 그린다. 풍경화는 채색과 무관하게 화려하다. 화려한 곳에서 화려함을 제하면 무엇이 남을까. 어떤 향수다. 그는 외부로 향하는 오감을 닫고 내부에서 길어 올린 샘물에 대한 표현으로 존재하는 '먹고 싶은 먹갈치'와 '일주일 같은 지난날'이라는 외침을 던진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내부의 빛 한줄기만을 바라보고 의미를 가장한 소리를 던진 것이다. 다만 소리가 악악거리지 않았을 뿐이다. 말이 가지고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없다.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을 그는 유언으로 내게 남겨 준 것이다.
남겨진 깨끗한 그의 양복과 넥타이.
일주일의 추억. 먹갈치.
그의 초상화는 흑백사진이었다.
그의 말은 의미를 가장한 소리였고 외침이었다.
살아 온 모든 곳에서 모든 미물과 생명이 남기는 소리였다.
아무도 없고 누구도 없는 공간에서
악악거리지 않는
외로운 소리였다.
산에 눈이 내리고 산에 밤이 온다. 찬연하다. 달빛이 비치면 노란빛이 입체감을 더한다. 집 벽에 오랫동안 걸려 있던 그림이 있었다. 눈 내렸고 눈 내리는 강에서 노를 젓는 노인이 있는 그림이다. 어린 그 때는 그림을 보면 배가 고팠다. 아이들에게 빵은 달고 그리고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런 빵 맛을 그 그림에서 보지 못했다. 허름하게 걸려 있던 이것저것들은 지저분했다. 눈 내린 산촌에 달이 비추면 갑자기 눈이 색깔을 띈다. 소리 없는 그 소리가 들린다. 다채롭고 화려한 색깔을 보고 숲과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머리가 미쳐 버린 것인가. 혼자 웃는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그 곳에서 혼자 웃는다. 유언과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곤 생각을 한다. 해도 생각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엇일 뿐이다.
오래 전
벽에 걸린 그림이 있었다.
눈 내리는 강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허름했고 지저분하였다.
빵 맛보다 달지 않았고 유혹적이지 못했다.
눈이 내린 산에 달빛이다.
찬연하다.
무채색의 눈이 밝은 채도를 가진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없는 색깔을 본다.
웃는다.
미쳐 버린 것인가 혼자 웃는다.
유언과 묘하게 일치한다는 생각이다.
생각은 단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엇일 뿐인가.
길을 쓸고 오른다. 그녀가 조금 앞서 걷는다. 무채색 눈의 채도가 높다. 눈을 집어 든다. 습기를 머금은 눈은 잘 뭉쳐지고 그리고 무겁다. 뭉치를 만들면 단단하다. 단단한 그것은 조용했고 무채색과 높은 채도의 어떤 것으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다. 눈을 치웠다. 눈이 바람에 날려 모여진 곳에는 오래된 눈도 있었다.
길을 쓸고 그녀와 언덕을 오른다.
뭉치를 만든다.
무채색의 눈이 높은 채도로부터 만들었다.
눈이 바람에 밀려 모여진 곳에는 오래된 눈이 있었다.
눈 뭉치가 단단하고 무겁다.
-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