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촌편지>이경달

왠지 쓸쓸하였다. 누가 말을 보탠다. 11월에 눈이네. 많은 눈이 내렸다. 바람소리다. 마당낙엽 위로 눈이다. 눈은 내리고 계곡은 쇳소리다. 이 눈과 소리의 틈으로 누가 온다. 소리를 들으면서 등성 위에서 어디를 본다. 저 멀리 조심하는 자동차의 노란빛이다. 나의 감(勘)은 그 차에 그가 타고 있다. 나는 그런 감을 가지고 있다. 눈은 '밖'에서 내리고 나는 여기에 서서 어떤 기억은 떠 오르고 어떤 생각은 한다. 감(勘)으로 생각한다. 대체 경계가 어디인지. '밖'에 대한 나의 '안'은 무엇이고 나의 '내부'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차가 도착했다. 눈길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뚫고 여기까지 왔다는 그의 설명을 듣는다. 나는 그의 짐을 들고 내려온 그 길을 따라 다시 올라간다. 그 곳은 오래 전부터 다른 세계인 나의 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현실을 생각하고 혼자 말을 하기도 하고 같이 말을 나누기도 한다. 눈 오는 언덕을 오르면서 말을 나누는 것은 '의미'가 아닌 '소리'가 위로이고 같이 있음의 상징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런 느낌에 그렇다는 이유를 붙인다. 산은 눈이고 우리는 길을 걸어 그 집으로 간다.

▲ 처마와 달

산은 눈이다.

비는 싸리비를 닮았다.

눈을 쓴다.

사람이 올 터인데,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온다.

무엇이 안에서 밖으로 솟아난다.

계곡에 바람이 지나고 생각은 나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눈이 오고 사람이 온다는 연락에

단추도 덜 채운 옷으로 밤에 눈을 쓴다.

산에 내린 눈이고 마당과 길에 쌓인 눈을 쓴다.

눈이 그치면 하늘은 맑을 것이다.

밤하늘이 맑을 것이다.

마음의 연못처럼 검은 그 곳에 소리없이 별이

조금 빛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빛나던 별들이 무지 많아지고 온 하늘은 별로 채워지리라.

그를 불렀고 그는 왔다. 이 집은 장벽이 있다. 의도하였다. 인간은 15세에 탄생하여 서른 초기에 정점을 이루다가 마흔 중반에 다시 무엇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이가 지혜의 상징이라고 이제는 누구도 그리 여기지 않는다. 나이 많으니 공경하라는 그들의 악다구니와 달리 나이가 추해진 현실을 파고다 공원을 지나고 농촌 겨울마을 지나고 여의도를 걸으면 안다. 나이가 짐이 되고 이 짐을 버티어 줄 '돈'이 충분하지 못하면 심한 불안이다. 나이와 불안이 간격을 갖지 않고 나이가 불안으로 즉각 치환된다. 나이가 지혜라고. 웃는다. 서글퍼서 웃고 떠나간 자들이 생각나서 웃고 인생이 한 갖 5분의 추억도 되지 않는 듯하여 웃는다. 웃는 것이 우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나이의 시대다. 그를 부른 것은 나이를 환기하고 싶었다. 그에게 '천천히 책읽기'를 권할 의도다. 천천히 책읽기는 생각을 가지고 생각에 휘몰리지 않는 읽기다. 다들 눈이 나쁘다. 천천히 책읽기의 때가 왔다.

마음에 장벽이 있다.

마음은 무엇이고 장벽은 무엇이냐.

가없고 위없고 아래 없다던 마음에 장벽이 있다면 그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이 뇌라면 뇌의 무엇이 장벽인가.

그 장벽은 무엇이고 장벽을 장벽이라고 느끼는 무엇은 또 무엇인가.

둘레의 나이가 초라하다.

병원이나 약국의 약이 늙어 시들어 가는 육체를 붙잡을 수 있다는

'틀림없는 육감'을 가지고 있는데.

뭔가 구름이 낀다.

장벽.

언덕의 이쪽과 저쪽을 그리던 그 때의 흔적이리라.

그래도 즐겁고 그리운 삶이라는 것은

경계를 넘나들고 넘나들다가 하나가 되고

하나가 둘이 되고 싸우다가 위로가 되는 그 것이겠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이 알고 있는가.

마음이 귀찮은가.

오래된 그에게 묻는다.

귀찮은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에는 층이 있고 기울기가 있느냐.

또 묻는다.

어느 때의 걱정을 안고 또 미래의 걱정을 안고 또 걱정과 걱정이 화학적 작용을 이루어 걱정을 만들고 그리 산다. 그가 즐길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그가 도중에 상점을 들렀다. 소변과 담배를 위해 마당에 나서는 그를 데리고 저 아래 빨간 우체통이 있는 다리로 간다. 하늘의 별이 원하는 만큼 맑고 밝다. 어느 사막의 추운 밤에 망토를 걸치고 별을 보았다. 밤에 사막으로 나갔다. 도시와 호텔 위로 돔과 같은 빛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걸었다. 사막의 밤이 무섭다고 한다. 무서운 내용을 상상한다. 다양한 소리. 삼십 분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호텔 밴드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보았다. 낯선 별이어야 할 터인데 왜 같은 별인가. 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탓인가 아니면 같은 북반구인가. 망토를 덮고 그녀와 손을 잡고 하늘을 본다. 한참을 보았다. 손을 놓고 다시 어떤 곳으로 돌아 왔다.

그는 찬 바람이 계곡에서 소리를 내는 이 곳에서

별을 본다.

그리곤 다시 즐거운 그의 술을 들이킨다.

그에게 생각은 무엇인가.

의도하지 않아도 계획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그 것.

어떤 바다가 폭풍을 내는가.

계곡을 지나는 바람이 소리를 낸다.

바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그녀와 사막에서 별을 보았다.

나는 그와 이 곳에서 별을 본다.

황도와 대삼각형과 방향을 잡고 본다.

그래도 별은 같은 별이고 같이 반짝인다.

얼마나 많고 얼마나 반짝이느냐 막연하다.

나는 사막에서 별을 보았고 돌아 오는 길에 그녀의 손을 놓고 걸었다.

걷기 힘들다는 이유를 달고 손을 놓았다.

우리는 무슨 이유를 달고 일상과 손을 놓고 싶은가.

따스한 방에 노란 전등이 있고

밖은 소리에 별은 총총하다.

아침. 그물같이 내려앉은 눈이 있는 들과 산이다. 차가 괜찮을런가. 그는 밤새 코를 골고 끙끙 앓고 잠을 잤다. 그의 숨에서 거친 소리가 잦아 들었다. 그가 피곤한 이유는 그를 둘러 싸고있는 눈 같은 그물망이겠지. 그물의 물고기. 가두리양식장의 살진 고기. 가두리 양식장의 출렁거리는 길은 무서웠다. 바다를 옆에 두고 구획진 곳에 바글거리는 고기를 보았다. 참 많았다. 도회지. 오늘 그는 그 곳으로 간다. 익지도 않는 사과가 떨어질 때가 된 듯한 나이다. 지금 도시에 무엇이 내리고 있을까. 도시는 눈과 비슷한 것이 있어도 눈이 없다. 모든 거리에 사람이 있다. 도시는 바쁘다. 그 곳에서 눈을 보지 못했고 차가운 검은 덩어리만 있었다.

생각이 그물처럼 내려 앉은 밤을 지난 마당에

눈이 내린 흔적이다.

눈은 어느 곳에 내렸고 어느 곳에는 흔적을 남기고 어느 곳에는 무엇도 없다.

어쩌면 그 곳은 눈이 내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지난밤 별을 보았다.

별을 보면 어느 순간 경계가 무너진다.

무엇이 이쪽이고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가

그런 세밀한 구분은 희미해지고 뭔가 또렷한 눈망울같은 의식이 있다.

사막의 별을 보았던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 밤 별을 보았던 그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하늘의 별처럼 툭 떨어져 내가 어디에 있다면

저 별 너머는 해가 지는 곳이고 달이 뜨는 곳이다.

지난 밤 사무쳤던 별에 대한 감각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무엇이 꿈틀대고 있다.

이 곳에 오기 위한 시작의 그 곳인 도시로 그도 갔다. 그에게 시작도 도시고 끝도 도시다. 도시가 그의 마음에 자리잡았겠지. 별이 뜨고 해가 지는 곳으로 도시가 되었겠지. 두텁고 튼튼한 칸막이가 처진 어느 곳에서 꿈을 꾸겠지. 좌표로 정해진 곳에서, 익명성을 보장하고 보장 받고 싶은 곳에서 그는 꿈을 꾸겠지. 도시는 시계가 필요하다. 그를 보낸 나는 언덕을 오른다. 사람이 떠난 길을 오른다. 길 아래 꿈이 흔들거린다. 떨어진 잎에 눈이 달라 붙어 있다. 잎과 눈은 소리를 낸다.

도시는 귀찮았고 도시는 편리했다.

어떤 곳은 조용하였고 어떤 곳은 시끄러웠다.

어떤 이는 안면이 있었고 어떤 이는 낯설었다.

모든 것이 많았다.

땅 아래 전깃줄이 지나가고 전화선이 지나가고

지하철이 지나간다.

사람이 지나가고 사람이 산다.

꿈을 꾼다.

흔들거리는 그 꿈 위에 이 곳이 있고 그 곳이 있다.

또 잎들이 있는 길을 걸어 산을 오른다.

-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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