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촌 편지>이경달

지난밤이 소란하였다. 밤중 피리소리에 잠을 깨었다. 마음 속의 소리, 환청인가 의심하여 자리를 떨쳐 일어났다. 그래도 소리가 있었다. 누가 마당에서 피리를 부는가 그런 갸웃거림을 가지고 마당으로 나섰다. 마당에 피리소리가 있었다. 저 아래 계곡에 바람이 분다. 계곡이 피리 통이 되고 그 바람에 세기를 더하거나 감해 소리가 난 것이다. 누가 심심한 봄일까 봄이 늦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자는 것을 염려하여 피리소리로 기척한 것인가. 마당은 잠잠하고 계곡은 피리소리를 내고 바람은 그 소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서니 피리소리는 작은 소리였다. 잠들었고 밤이라서 큰 소리로 들린 것인가. 잠시 앉았다. 그런데 그 곳에 누가 있었다. 밤을 소란하게 다녀 갔지만 그는 있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이경달 객원기자
그는 다녀 갔지만 있었다
바람 속에 그는 있었고 총총한 별에도 그는 있었다
단지 떠나갔다는 말에 울적한 나를 염려한 그가 있었다
아직은 얼어 딱딱한 마당의 감각으로 그는 있었다
나의 고요와 나의 두려움과 한 밤에 창을 여는 내 안에 그가 있었다
깜깜한 밤에 그는 있었고 추위에 고개 숙이는 나의 몸짓에도 그는 있었다

'다녀가마'라고 한 약속의 그가 흔적을 남겼다
뒤 뜰 갈잎과 밭의 마른 쑥대에도 그는 흔적을 남겼다
창으로 통한 아침 햇살에 호들갑거린 내 감정에 그는 흔적을 남겼다
음악을 듣는 나의 무심함에 그는 흔적을 남겼다
햇살 귀퉁이를 차지라고 배를 깔고 있는 고양이에게 그는 흔적을 남겼다
무심코 건드린 돌멩이에도 내가 입고있는 옷에도
그는 흔적을 남기고 남겼다

다시 문을 열고 그를 만난다
작은 잎이 녹색이다 나는 그를 만난다
그를 이승의 녹색에서 만난다
건들거리는 나의 몸짓에서 그를 만난다
손이 닿는다 그를 만난다 심호흡이다 그를 만난다
허리의 피로에서 그를 만나고 망치 든 손에서 그를 만나고
움켜잡은 한 아름의 못에서 그를 만나고 멀리 떠가는 저 구름에서 그를 만난다

그의 부고를 들었다 그는 이승을 떠났다
이승에 살았던 그가 이승에 남았다
남긴 것이 재 한줌이라고 했지만
흩어지고 남긴 것이 한 아름에 아름이다
남은 자가 날을 정해 만나지 않아도
문을 열면 다녀가고 고개를 들면 그는 거기에 있다
가슴에 찬바람이 불어도 손 끝이 시려도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지 않아도 그를 느낀다.

삼라만상이 '그'라고 하였던 그가 떠났다는 부고를 받았다. 일에 피곤하여 이르게 잠에 들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일과 저런 일이 떠 올랐다. 사혈하다. 가슴이 아파 피를 뽑았다. 한 줌의 피를 그녀가 뽑았다. 그는 다른 부고와 다른 죽음이었다. 달리 갈 곳도 없는 그가 갔다. 어디로 갔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내게 다가와서 흔적을 남기고 감각을 남겼다. 나는 그와 같은 세상에서 다른 세계를 산 것인가. 늦은 봄날의 위로를 보내 주었고 한밤의 심심함에도 위로를 보내 주었다. 아침에 만났다. 그런데 한밤중에 피리소리 속에서 만난 것은 늦게 알았다.

   
▶산위 안개가 되다
그는 산이 된다
그는 들이 된다
지난밤 그는 바람이 된다
아침에 흔들리는 나의 어깨가 되고
건들거리는 나의 아침이 되고, 아침의 안개가 된다
그는 무엇이 되고 또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이경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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