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촌 편지>바람을 듣다 - 단식

2009-02-26     광주뉴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왔습니다. 오던 날 들에도 산에도 눈은 내리고 눈은 쌓입니다. 평상에 눈이 십 센티나 됩니다. 도회지의 그들이 눈과 바쁘게 씨름하는데 바람이 붑니다. 겨울은 바람 속에 있습니다. 눈이 온 이런 날 언덕에 선 내게 바람이 몰아치면 기억이 됩니다. '겨울은 바람이 불어 춥다'라는 그 것입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 강으로 갔습니다. 운동장은 잔설이었습니다. 바람에 밀려 날아가고 젖어 있고 얼어 있었습니다. 운동장. 바람을 마주보고 달리기를 했습니다. 철봉도 잡고 흔들거렸고 회전하는 놀이기구에 매달렸습니다. 여긴 바람이 많은 곳입니다. 동네 분들은 '풍기'보다 바람이 많은 곳이 여기랍니다. 소백산 아래 풍기가 전국에서 바람이 제일 많은 곳인가요. 그 바람에 아홉 살 난 여자아이는 머리칼이 젖히고 다섯 살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입니다. 강으로 갔습니다. 얼음은 있었지만 눈은 없었습니다. 강바람. 바람을 등에 지고 걷고 또 바람을 등에 지고 걸었습니다. 물이 마지막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고운 모래입니다. 돌을 들어 물 수제비를 날리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텀벙거림이었습니다. 깊은 강을 다리 위에서 바라본 그들은 각기 그들이 사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갔습니다. 이와 무관하게 바람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녀의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바람에 봄 냄새가 있네. 난 춥기만 한데 그녀는 냄새를 맡았군요. 열흘째 단식중인지라. 민감한 후각에서 찾아낸 것이 온기 없는 바람 속에서 봄 냄새였는가요. 여태 봄이 오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기다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경달 객원기자
단식. 열흘 단식을 세분이 하였습니다. 지금은 회복식 중입니다. 한 분은 사십 중반의 남자입니다. 공장을 다니는 분입니다. 분진과 냄새를 어이 잘 견디고 틈틈이 몸을 풀고 그리고 보호장비를 잘 착용해서 하는 단식입니다. 또 한 분은 내일이 사십인 여자입니다. 생태나 음식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이번 단식에서 고생이 많았습니다. 결혼하기 전 보름단식 경험이 있어서 당당했지만 위가 아픈 탓에 마음이 흔들렸고 또 장이 좋지 않는 분들의 일반적인 특징인 머리가 띵하고 멍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단식의 즐거움을 아직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들은 단식 준비를 잘했습니다. 뱃속을 오랫동안 효소로 채워 왔고 물을 날로 마실 뿐더러 육류 멀리하고 거친 음식 가까이 한 생활로 배변의 상태도 좋았습니다. 또 한 분은 집의 그녀입니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 하는 단식이 이십 년 전의 그 때보다 잘되고 잘합니다. 그들과 연락을 하고 그들과 말을 나누고 잔소리도 하고 또 방법도 일러준 긴 날입니다. 어떤 분은 가을 하늘에 부는 맑은 바람을 맛 볼 것이고 어떤 분은 아직 몽롱한 날 귀찮은 황사가 머리 속에서 요동 칠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업보입니다. 자신의 현재 몸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강가의 그늘)

바람을 등에 지고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겨울이 참 길구나 그런 느낌입니다. 봄이 오면 바람을 등으로 맞지 않고 옷깃도 내릴 것입니다. 수많은 창 끝으로 찔러 대던 바람에 막을 방패가 옷깃이고 등으로 바람을 맞는 것이었던가요. 바람과 맞설 수는 없습니다. 장풍득수(藏風得水). 집을 지을 때에도 바람의 갈무리가 먼저 입니다. 이 산촌에 계곡을 끼고 집이 있습니다. 바람이 많은 집이지요. 바람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만든 돌 벽입니다. 바람은 벽 너머에도 있습니다. 집에서 그녀와 둘이서 보냅니다. 지나는 시간이 바람 같고 머무는 시간이 바람 같습니다. 바람은 지나가고 바람은 맴돕니다. 날이 변하고 있습니다. 마당의 눈이 다 녹았습니다. 바닥은 얼어 딱딱하지만 눈은 없습니다. 앓아누울 몸살의 때가 왔는가요. 무릎이 시리고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결립니다. 모든 관절이 아픕니다. 겨울 눈발에 무슨 업인지 집을 짓는 노동의 양보다 추위가 불러온 몸살인 듯합니다. 나이 값을 못하고 이렇게 무리합니다.

단식의 위력이 여럿 있지만 자기성취욕이 큰 것 같습니다. 마음 속에서 굴러다니는 게으른 '나'나, 작정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연민이 일거에 사라집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 어렵습니다. 포식과 폭주가 세상사는 즐거움인데 이걸 제쳐 두고 한 달 두 달 동안 자기를 속이지 않는 수도승이 되는 것이니까요. 포식과 폭주가 없는 사회는 어떨까요. 생각으로 밀쳐 둡니다. 매년 이때면 하는 공부가 있습니다. 식이요법에 관한 것입니다. 늘 내리는 결론은 작은 자기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분 중에 단식이 힘들었던 여자분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가집니다. 더구나 예민한 성격이라서 장이 뒤틀리기도 했을 것이구요. 연습을 해서 무디어져야 합니다. 과민한 성격이 강박증으로 건너가지 않게 자꾸 무디어지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연민이나 애증 이런 것도 감당할 만큼만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나의 이성의 기반에서 움직이는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감이었습니다.

그녀가 바람 많고 추운 곳에서 하는 단식입니다. 냇가로 내려가서 겨울빨래를 합니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달리 추위입니다. 오랜 단식 경험의 그녀이지만 굶으면 배가 딱딱해집니다. 찜질로 잘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왕 뜸을 사용했습니다. 단식 중에 잘 알고 있는 요법을 사용하면 효과가 배가될 수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아픈 여자가 아니라 건강하고 튼실한 분이 옆에 있어야 편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분들은 좀이 쑤셔서 일 하지 않고 못 견딥니다. 추위와 무관하게 환기를 해야 하고 청소를 하고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합니다. 이런 건강의 정도면 잔소리도 별로 없습니다. 장이 편안해진 그녀가 배가 고프답니다. 배고프지 않는 단식에서 배고픈 단식이 되었네요. 단식이 배가 고픈데 잘 조절시켜 배고프게 않게 한 나의 공로(?)를 모르다니. 웃었습니다. 언젠가는 육신에 이끌리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조절하는 육신과 감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혈당증세'로 고생했던 그녀였지만 사라졌습니다. 밥 한끼만 굶어도 손이 떨리는 그녀가 단식 열흘을 쉽게 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연약한 육체에 숨겨진 인간의 의지 뭐 이런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봄입니다.)

바람이 머물렀습니다. 두터운 잠바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가면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도 발 밑으로 와서 소리를 냅니다. 멀리서 보면 굶는 자는 나입니다. 다시 방문을 엽니다. 쑥 냄새입니다. 그녀에게 왕 쑥 뜸을 해주느라 배인 향입니다. 인간의 구취가 사라졌고 체취가 사라졌습니다. 쑥의 냄새가 그리 만들었습니다. 덤으로 생긴 것입니다. 쑥 뜸을 공부한 것은 오래 되었지만 단식 때는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단식을 하면 나는 마당에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단식이라는 말만 들어도 긴장합니다. 나의 단식은 편안한데 그들의 단식이라면 풍찬노숙 추운 날 꽁꽁 굶는 모습이 떠 오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성인(聖人)되면 그들에게 기대어 살겠다는 나의 기대가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인가요.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길을 걸을 뿐인가요. 이것저것 생각이 많은 날입니다. 겨울 마지막 자락에 머물렀던 바람이 다시 불고 있습니다. 바람소리를 듣는 밤이 될 것입니다.


이경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