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을 읽고

<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2016-12-19     광주뉴스

당연한 말을 흔히 ‘공자님 말씀’이라 한다. 공자님 말씀에 질리셨는지? 그렇다면 좀 역설적이고 유머러스하고 신랄한 말씀으로 당신의 입맛을 바꿀 때가 되었다. ‘공자님 말씀’과는 반대로만 이야기 하는 분이 바로 장자(莊子)이다.

장자가 말하는 처세의 지혜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다! 메추라기가 산속에서 둥지를 틀어도 가지하나에 불과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탐해도 배밖에 못 채운다. 욕심을 부려봐야 결국 얻은 것은 그뿐이라는 뜻이다. 우리인생이란 노력이나 계산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지극히 불안정하고도 예측 불허의 것이라, 과욕은 실패를 부르고, 실패는 실망과 낙담을 일으키고, 그런 실망과 낙담이 반복되고 깊어지면 현대인들이 많이 앓는 우울증이 된다.

과욕을 부리면 얻는 것보다 오히려 잃는 것이 훨씬 많다. 그와 동시에 아름답고 소박한 품성까지 타락하여 천박해진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다. 장자는 태곳적 원시사회를 낙원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그 시대로 돌아가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하늘보다 넓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그 짧은 시간에도 하늘과 땅을 두 번이나 왕래한다고 않습니까? 결국 행복의 낙원은 멀고 아득한 옛날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곧 행복의 시작이다. 지금으로부터 2470년 전 송나라 몽성이란 곳에서 ‘장주’라는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장주의 집안이나 부모님의 교육 정도가 어떻게 되는지는 관련 자료가 미비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우아하고 고상한 ‘주’만으로 보건대 교육을 잘 받은 귀족 가정이 아닌가 싶다. 

다만 장주가 어렵게 산 것으로 보아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음은 확실하다. 내용 중에 장주가 친구에게 양식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경제적 상황은 꽤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주는 재물에 초연했고 명예와 권력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비록 몸은 인간 세상에 있었으나 이미 사회를 등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단과 도구에 만족했다.

어느날 장주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물고기를 거의 한바구니 낚았을 무렵, 양나라에서 출세하여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혜시(장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마차 수십 대를 이끌고 장주를 보러 왔다. 혜시는 선두마차에 앉아 있었다. 장주는 아는 척도 안하고 물고기 한 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강물에 풀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주는 애써 먼 길을 달려 찾아온 혜시를 외면한 채 물고기 한 마리만 달랑 들고 집으로 가벼렸다. 혜시는 무안했지만 역시 장주의 찬구답게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곤 그냥 양나라도 돌아갔다. 

장주가 왜 그러는지 혜시는 물론 알고 있었다. 마차 한 대면 족할 일을 굳이 허세를 부리고 과시하는 자신을 장주가 풍자했음을 친구는 알고 돌아갔다. 권력의 마력과 부귀영화는 포악한 흑룡의 고개 아래에 있는 보물과 같아서 그것을 얻으려면 우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깊은 못으로 잠수해야 하고 이어서 목숨을 걸고 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령 그런 보물을 손아귀에 넣었다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목숨을 잃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권력과 부귀영화는 마치 위험물질과 같아서 절대 손끝도 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목숨을 걸고 위험하게 사느니 오히려 빈곤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귀영화의 즐거움만 봤지 부귀영화를 얻는 과정 그리고 얻은 후에 도처에 잠복된 생명의 위험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장주의 생각이었다. 생명을 보전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장주가 위험천만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먼지처럼 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1000년이 지난 현세의 상황에서 성현 장주의 지혜가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