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촌 편지>옥색치마

이경달

2009-12-22     광주뉴스

뼈마디가 시린 날을 탓하였습니다. 무리했던 나를 제쳐 두고 날을 탓하였습니다. 누워 있는 이 날 정오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입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을 전한 그녀는 목이 메었습니다. 올해 들어 자주 목이 메는 그녀를 타박하였습니다. 내리는 눈입니다. 바람을 몰고 내리는 눈을 나는 창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부모은중경'의 그분이, 진자리 마른자리의 그분이 눈을 감으신 것입니다. 삶이 희미한 내게 세상이 가지는 척도가 아닌 죽음이 있기나 한 것인가요. 반신반의를 넘어선 '어떤 북받침'입니다. 삶이 예 있으면 거기에도 있는 것이고, 죽음이 예 있으면 거기에도 있는 것이지요. 유의미한 관계를 넘어선 부음(訃音)를 들었습니다.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
참으로 흔해졌다는 느낌의 죽음은 나의 의식에서 무엇인가요. 우리는 자기의 경험으로 죽음을 의식합니다. 혹 드라마나 영화 소설 또는 신문을 통해 만납니다. 옛적, 큰 못을 둘러싸고 있던 그 곳에 흰 묘비의 무덤이 즐비하였습니다. 흰 묘비는 시멘트에 흰 페인트를 칠한 것이었습니다. 지중해에 떠 있는 섬이 흰 페인트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요. 빛나는 흰 무덤이 있는 곳의 중심에 역시 흰빛의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집단 무덤이 드문 때에 떼 무덤을 본 것입니다. 아마 내 나이전후로 대개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 그러니, 그가 본대로 그가 느낀대로의 죽음을 뭉떵거려 '죽음'이라는 용어로 대표하는 듯 의식하고 그리고 행동하겠지요. 죽음, 그 실체는 무엇인가요. 마지막 날숨 한번이 결정짓는 것인가요. 잠깐의 경련과 호흡곤란인가요. 모인 것이 흩어지는 과정인가요. 모두를 만나 죽음에 대해 묻거나 전후로 한 감정의 변화를 뇌 사진으로 찍어 관찰한다고 해도 역시 모호할 것입니다. 단순한 죽음이 모호합니다.

입관을 앞둔 의식은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이 전시된 박물관의 장면 같았습니다. 소식을 전해 받은 그 때부터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발이 하늘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평온했던 얼굴을 손에 댄 뒤에는 알코올이 가지는 냉정함과 냉동 보관되었던 시신의 싸늘함이 내 두 손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뜨거운 물로 털어 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기억과 감각이 희미합니다. 늙은 분이 지상에 남긴 흔적은 또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지만, 지금 그것도 희미합니다. 장례를 둘러싸고 늘 일어나는 소란과 절차에 대한 자기의견과 시시껄렁한 농담과 지나간 추억에 대한 일그러짐을 보았습니다. 이승을 두고 가고픈 곳이 저승이었다면 이승은 무엇이었고 저승은 무엇이 되는가요. 경주의 능을 보고 백제의 고분을 보고 그리고 의총이나 국립묘지를 보아도 떠 오르지 않았던 것이 이런 이승과 저승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분들은 그분의 천국을 말하였지만, 혹 자신들의 불안을 떠 올리는 행위가 아닌지 그런 의구심이었습니다. 다만, 이승에서의 흐트러지고 불편했고 말하기 거북했던 관계와 일들이 묻히는 경계로서 죽음은 있는 듯합니다. 죽음은 불편을 털어 버리는 관문인가요. 이런 생각에는 늙고 병듦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리고 존재의 한 방편으로 받아 들이지 못한 탓이 있을 것입니다.

가슴에 샘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맛이 없는 음식이 있음을 알았고, 소주 한 병이 근심을 푼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타박하는 것도 또 하나의 변명임을 알았습니다. 긴장했던 그 때와 다른 긴장이 있음도 알았습니다. 이런 것이 조급함에서 생긴 것이라면 역시 외롭고 고독한 것도 비슷하겠지요.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시간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희미하게 든 것도 어쩌면 이번 죽음이 계기가 된 탓인가요. 그냥 죽는 것과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 의식에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이겠지요.

삼오(三虞)날. 무덤을 몇몇과 들렀습니다. 그리고 소지(燒紙)하였습니다. 살아서 보고싶었던 누구를 대동하였습니다. 누가 왔다고 하는 글이 있는 종이를 불살라 떠나간 이에게 알렸습니다. 종이를 불살라 죽은 자와 인사하는 법이 남아 있음은 다행이었습니다. 무덤을 둘레로 남은 자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별을 고(告)하였습니다. '잘'가시오. '잘'이라는 말은 늘 애매하였지만 또 사용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도 이별을 고하였고 죽은 자에게도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잘 가시오. 죽은 자나 산자를 위한 춤을 보고 싶다던 말이 왜 그 날 떠 오른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 간단하게 헤어지기가 쉽지 않았던가요. 이별은 숨쉬는 것과 같은 일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별은 집을 떠나던 너무나 오래 전의 그 날과 닮았다는 이질감이었습니다. 이질감이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흐르는 생각이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 생각의 바다에 빠져 있었음을 문득 느낍니다.

옥색치마. 그녀에게 가신 그분의 옥색치마를 가질 수 있거든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했던 그 시절에 탐욕이나 욕망의 반대편에 있던 분들은 눈물이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내용입니다. 꿈이고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억울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뚱뚱한 분이 젊은 그 때 배고픈 이야기에 눈물입니다. 젊어서 집 떠나는 나를 만나러 온 그 때 입었던 옥색의 한복입니다. 치마가 있으니 저고리도 있겠지요. 찬 바람을 막느라고 그 때에는 치마를 문에 걸쳐 두었습니다. 기억은 절로 사라지고 없는 기억도 절로 만들어집니다. 아마 이 옥색치마 저고리에 얽힌 기억은 변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 그 때의 한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계층이 다양화된 사회에서는 촌스러움의 상징이겠지요. 이 산골 둘레로 몸뻬 입는 여자분을 봅니다. 밭에 김을 메거나 산에 약초를 캐러 다닐 때 입습니다. 그러니 산촌에서의 옥색치마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옥색치마를 생각한 것은 산자들이 죽음을 맞이해서 가지는 위세 때문입니다. 위세는 돈과 체면입니다. 가난했던 상징같은 기억들이 이런 위세에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진주사(將進酒辭). 장례를 둘러싼 분위기에서는 한껏 시조일 따름이었습니다. 단순 판단의 대상이 되어버린 관념과 다른 죽음을 보았습니다.

   
▶잎 없는 나무
다시 산촌입니다. 몇 일을 누었습니다. 요와 이불을 땀으로 적셨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장례에서 본 분들의 나이도 만만찮아 이제는 다들 때를 준비해야 할 것으로 말을 건넸지요. 나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그들의 죽음도 때가 멀지 않았음을 비추었습니다. 이런 말이 오가는 뒷면에 혹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음에 품위를 가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장기와 시신 기증한 분의 말도 덤으로 있었습니다.


-여우촌에서
이경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