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면의 역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이 이곳에 있어, 2015년 ‘중부면’이었던 행정구역명을 ‘남한산성면’으로 변경하고 현재에 이른다. 병자호란 전인 1600년대 초반 광주부를 광주 유수부로 승격시켜 남한산성 안에 행궁을 설치하고 유수부 관아를 옮겼다.

1906년(대한제국 고종 44년)에는 광주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 설치하였다. 이후 1917년 산성리에 있던 군청을 경안리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은 300여년 동안 광주의 중심지였다. 그런 이유로 2015년 행정구역명 변경 전에는 이곳을 고을의 중심이라는 의미의 ‘중부면(中部面)’이라 불렀던 것.

현재 남한산성면은 산성리, 오전리, 불당리 등 8개의 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면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했던 곳이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여일간 항전했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남한산성 안에 건설했던 행궁은 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는데, 남한산성 행궁은 왕의 임시 거처와 더불어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 조선의 20개소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었다. 비상시에 예비 수도의 역활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어 놓았던 것. 원래 226.5 칸의 규모였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헐어버려 터만 남아 2002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여 2012년 252.5칸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며,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하남위례성을 남한산성과 연관 짓는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대부분의 조선 시대 지리 관련 문헌에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는 주장이 실려있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을 최초의 백제 수도인 하남위례성으로 지목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한 두 번째 설은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 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신라 문무왕 12년에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과 투쟁에 들어간 시기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축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후 연구에서 주장성과 남한산성의 크기를 비교하여 볼 때 당시 한산 지역 산성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는 것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또 인조가 산성을 개축할 때 “옛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 ‘남한지’의 기록이 남아있어,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조선 인조와 숙종 때에 이르러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였으며, 1971년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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