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동의 유래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하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의 전설이 있다.

이때 그가 남하하여 나라를 세운 회안국(淮安國)을 이곳 경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문헌상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회안(淮安)의 음은 한(韓)의 연장음으로서, 광주의 옛 이름에 한산(漢山,지금의 남한산)·한성(漢城, 지금의 남한산성)·한수(漢水)·한주(漢州)와 같이 ‘한’자가 계속 붙어온 것 역시 이 지역과 한(韓)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전엔 경안동에 ‘회안교(淮安橋)라는 다리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경안(慶安)’이었으나 일제 시대를 거치며 1910년대 이후 ‘경안(京安)’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회안국은 마한의 소국이었으며, 지금의 광주 경안지역에 도읍하였다고 전해진다.

마한은 원삼국시대에 있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삼한시대 초기에는 진한과 변한을 모두 지배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의 명칭이 열거돼 있으며 큰 것은 1만여 가(家)를 이루고 작은 것은 수천 가(家)를 이루고 있었다고 쓰여있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 계통인 온조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십제국(十濟國,후에 백제)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6세기 중엽에는 남아있던 전라도 마한을 통일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도 마한과 온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서노는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고주몽)에게 개가하고 재산을 기울여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했다. 

그 때문에 추모왕은 소서노를 정궁으로 대접하고 비류, 온조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그 후에 유류(儒留: 유리왕)왕자가 동부여에서 돌아오자, 유류가 태자가 되었다. 이에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낙랑국을 지나 마한(馬韓)으로 들어갔다. 

소서노는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미추홀(지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지금의 송파)’를 얻어, 국호를 ‘백제’라 했다.

백제가 마한의 봉토를 얻어 건국하였으므로 마한에 대해 공손히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였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에는 온조가 서북의 예와 낙랑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자를 보내어 꾸짖기를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내려왔을 때 발 디딜 땅도 없다가 내가 서북 백리의 땅을 떼어주어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이것이 어찌 의리상 허용될 수 있는 일이냐.”고 했다.

온조는 거짓으로 부끄러운 빛을 보이고는 성책을 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마한을 습격하여 마한 휘하의 50여 개 나라들을 다 쳐서 멸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나라의 기반을 크게 세웠다.

이렇듯 백제는 마한의 54개 연맹국의 하나로써 마한의 종주국으로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주변 연맹국을 흡수하여 결국 마한을 통일하게 된다.

그 과정에 이곳 경안에 도읍을 삼았던 회안국도 백제에 흡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한반도의 고대사는 문헌과 출처가 분명치 못하고, 후대의 조악한 연구를 바탕으로 첨삭 되어진 경우가 많아, 이 역시 공인된 학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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