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척면 지명의 유래

온조왕은 백제의 시조로써 삼국유사에서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사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하였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유리 왕자를 태자로 삼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비류가 죽은 후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말갈의 침입이 잦자 기원전 5년에 도읍을 남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겼다. 

이렇듯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수없이 이곳저곳을 탐사하던 당시 도척면 방도리 일대가 마음에 들어 수차례 답사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온조왕이 이곳 방도리 일대를 도읍으로 정할지 말지 재고 또 재며 심사숙고 하였다 하여 읍 '도(都)'자와 자'척(尺)'자를 써서 '도척(都尺)'이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된다.

도척면은 광주시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화산과 정광산이 면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도척면에 흐르고 있는 3개의 하천 모두 곤지암천으로 합류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도척은 평균 해발 140m로 광주시에서는 비교적 고지대에 속한다.

예로부터 벼농사는 물론 인삼재배, 목축업이 발달 된 곳이며 밭작물 ‘토란’의 주산지 이기도 하다.

현재는 중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으며, 영동고속도로 덕평IC로 통하는 지방도가 개설되어 있어 편리한 교통을 내세운 물류기지 역할이 기대되는 지역이다.

도척면에서는 선사시대의 유물과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가 빈번하게 발견되곤 한다.

중부고속도로건설 당시 고인돌등 많은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어 음성휴게소에 보관 전시되고 있으며,30곳의 백자 도요지가 발견 되었다.

조선조말에는 13개의 법정리로 구성 되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9개리로 축소 조정되었고 그후 1973년 삼리가 광주시 실촌면으로 편입되며 8개리의 법정리로 축소,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중 궁평리(宮坪里)는 조선시대에 궁(宮)에서 내린 넓은 들이라고 하여 ‘궁뜰’이라 전해오다  행정구역 개편시 대궐 궁(宮)자와 들 평(坪)자를 써 '궁평리'로 하였다.

추곡리는 조선 시대에 서판서란 분이 피난처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집주위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었다 하여 ‘가래실’로 불리다 가래나무 추(楸)자와 골짜기 곡(谷)자를 써 ‘추곡’이라 하였다.

상림리는 이마을 뒷산의 형태가 누에모양이고 이곳에서 뽕나무가 잘된다고 해서 뽕나무 상(桑)자를 써 ‘상림리(桑林里)’라 하였는데 후에 상서로울 상(祥)자를 써 ‘상림리(祥林里)’로 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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