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읍 지명의 유래

‘초월’읍(草月邑)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자연(草) 속 달(月)빛이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초(草)는 자연을 뜻하며, ‘월(月)’은 무갑산 정상에 떠오른 달을 뜻한다.

달빛이 무갑산 정상을 비추면 달빛에 어우러진 무갑산의 전경이 너무 아름답다 하여 ‘초월(草月)’ 이라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 전해오는 구전으로는 초월읍의 지형이 마치 초승달 모양이라 하여 초승달을 뜻하는 ‘초월(初月)’이었다가 후에 ‘초월(草月)’로 바뀌었다고 한다.

읍의 위치는 광주시 전체를 놓고 볼 때 시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광주의 대표적인 무갑산과 관산이 동쪽에 있고, 서쪽으로는 오포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마산이 초월읍 전체를 감싸고 있는 지형이다.

예전부터 평야보다 산이 많았으나, 농경지가 많고 용수가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곤지암천이 읍내를 동서로 나누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지월리에서 경안천과 합수하여 팔당호로 유입된다.

광주시에 가장 넓은 벼농사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주곡재배 뿐만 아니라 양잠과 인삼재배도 활발하였다.

초월읍은 12개의 법정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리의 명칭에 달(月)빛이 들어간 지명이 2곳이 있다.

지월리와 신월리가 그곳인데 이에 비추어 짐작해보면 예부터 이곳 초월의 달빛이 아름다웠던 듯하다.

용수리 지명의 유래는 옛적 이 마을에 한 심술궂은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시주를 구하는 스님에게 고약한 부자는 시주 대신 쇠똥을 주었다고 한다.

스님은 갖은 수모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묘를 잘 가꾸면 지금보다 더 잘살 수 있으니 조상의 묘 앞에 망두석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욕심 많은 부자는 조언대로 건너편에 있는 자기 조상의 묘 앞에 망두석을 세우려고 땅을 팠는데 엄청난 물이 나와 내를 이루었으며 조상의 묘는 물에 잠기고 산은 용의 머리 모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마을을 용(龍)자, 물(水)자를 따서 ‘용수리(龍水里)’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이리는 신(酸)맛나는 배(梨)가 생산된다고 하여 신배골이라 하다가 산이리(酸梨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무갑리는 이 마을 뒷 편에 해발 400m나 되는 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무인(武人)'이 입던 갑옷(甲胃)이 나왔다고 해서 이 마을을 '무갑리(武甲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초월읍의 유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병자호란과 쌍령전투이다.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 14년(1636) 이 땅을 침략하여 오자, 당황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여 청군과 대치하여 싸우게 되었는데, 성이 완전히 청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포위된 인조를 급히 구출하고자 수만의 군사가 남한산성을 향하여 가던 중 초월읍 대쌍령리에서 청군과 조우하게 된다.

때는 엄동설한에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훈련도 안 된 병졸들이 청군의 잘 조련된 기마부대와 맞붙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조선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모조리 다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이때 초월읍의 많은 읍민들이 도평리의 낙화암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도평리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지금까지 진혼제를 올리고 있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결국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으며, 이때의 전투에서 순절한 장군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정충묘〉가 대쌍령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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