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남한산성을 다시 찾은 날 아침은 평일의 이른 시간이어서 주말에 보았던 등산복 입은 사람들 풍경은 온데 간 데 없고 비까지 내려 우거진 수풀이 여름이 무르익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남문 주차장에 도착하니 그동안 보아왔던 복잡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고요하면서도 자연풍경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하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비로소 다시 보이는 남한산성의 풍경을 따라 서서히 걸어본다.

필자는 본격적으로 광주나들이를 시작하면서 꼭 알아야 하는 곳으로 남한산성을 꼽았었다. 사실 남한산성을 다 공부하려면 한두 번으로 안 되고 시간 날 때마다 수시로 와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이날도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다. 지난번 들렀던 숭렬전을 다시 찾으니, 입구에 새롭게 부착한 듯 팻말이 하나 붙어 있지만 여전히 찾기 어려워 보인다.

원래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가 있었다는 곳이 궁금하여 ‘침괘정(枕戈亭)을 찾으니 이곳은 공사 중이다. 수평이 기울여졌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래서 급하게 숭렬전으로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바로 옆에 있는 ‘행궁’ 또한 코로나19로 문을 닫았고……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현절사(顯節祠) 쪽으로 향하니, 흐렸던 하늘에 다시 해가 비친다.

찻길에서 작은 사이 길로 올라가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현절사가 있었다. 현절사는 비교적 말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렇게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는 이유 중에는 위토(位土)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토는 문중의 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일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토지이고, 주로 이런 사당을 지을 때면 위토를 함께 마련하여 사당을 관리하게 한다고 하는데, 숭렬전에는 위토가 없고 현절사에는 위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위치한 현절사(顯節祠)

현절사(顯節祠)에서도 숭렬전과 똑같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봉심(奉審: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소나 묘우를 보살피는 일)을 하는데 유도회 어르신들이 반 씩 나뉘어서 숭렬전과 현절사에서 동시에 봉심을 행하는 것이다.

이 현절사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우궁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대신들은 친화(親和), 척화(斥和)로 나뉘었고 위 세 사람은 척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결국 친화로 결론이 났고, 이를 계기로 위 세 사람은 봉림대군(鳳林大君:조선 제17대 왕 효종으로, 봉림대군은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과 함께 청나라로 붙잡혀 갔다. 

세명은 청나라로 끌려간 후 청의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충정에 감탄한 청 태종은 이 세 사람에게 ‘삼한삼두(三韓三斗)-태산과 북두칠성과 같이 높은 절개를 가진 이들’라 칭송했다고 한다. 

조선의 조정에서도 이들의 충의와 대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 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각각 내려졌고 이들의 신위를 지금의 현절사(顯節祠)에 모시게 된 것이다. 이들의 묘는 각기 평택(홍익한), 강화(윤집), 용인(오달제)에 시신 없는 묘가 있으나 삼학사의 신위는 현절사에 모셔져 있다.

필자는 현절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민에게 ‘나라’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나라에 해를 끼친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애국자도 아니었던 나 자신을 생각하며 ‘나라’의 존재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해진다면 과연 삼학사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최근 우리는 역사에 대한 해석도 다양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지금의 저 현절사야 말로 역사의 귀감으로 삼아 교육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세 충절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이곳 남한산성 안에 그 역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본다.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