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이창봉 중앙대 예술대학원 공연영상학과 겸임교수

우리나라 여류시인의 원류를 따라 올라 가면 만나게 되는 그녀,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중국, 일본조차 그녀의 시를 애송하며 칭송했던 위대한 한국 여류시인 허난설헌.

대한민국 건국의 은인, 근현대사의 뿌리였던 독립운동과 민주화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

한국영화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배우, 어두운 여건 속에도 수없이 많은 영화를 찍고 제작했던 예술인 최은희 배우.

위대한 한국을 만든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무엇일까? 바로 광주사람(허난설헌은 어린 시절 광주로 시집와서 사망)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에서 강의시간에 이 세 사람의 작품을 인용할 때가 있다. 그분들의 삶은 지식과 행동함이 한결 같고 눈부시게 맑다. 그 울림은 깊고 오래간다. 그런데 세계가 칭송하고 기념하는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우리가 잘 모르고 지나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땅에 묻혀 있어 되살리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세 사람을 광주의 인물로 널리 연구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벌인다면 우리 광주는 미래 문화발전의 커다란 컨텐츠요, 동력을 얻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 잠깐 소개하려고 한다.

세계가 칭송하는 조선시대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1563년 강릉에서 태어나서 15세 어린 나이에 광주로 시집와서 살게 된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봄 햇살처럼 맑고 밝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그러나 남존여비 시대, 봉건주의적 시집살이 속에서 갖게 되는 한을 자신의 내부에 담아 시를 통해서 표출했다. 27년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태운 문학에의 열정, 절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정갈한 외침으로 들린다.

한시의 나라 중국에서 먼저 허난설헌의 한시를 칭송했고 일본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창가에 난초/어여쁘게 피어나//잎과 줄기/어찌나 향기롭던지//하지만 서녘 바람이/한 번 스쳐 흩날리자//슬프게도/가을 서릿발에 다 시들고 마네//빼어난 그 자태는/시들어 파리해져도//맑은 향기만은/끝내 사라지지 않으리니//그 모습 바라보다/내 마음이 쓰라려//눈물이 뚝뚝 떨어져/옷소매를 적시네 - ‘난초를 바라보며’ 전문.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건국의 은인인 해공 신익희 선생은 1894년 광주 서하리에서 출생했다.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혈연단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유학생 통합단체인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며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어 신문화와 개화사상을 보급했다.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 해 일경의 체포령을 피해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차장, 국무원비서장, 외무총장 서리,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시고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그리고 귀국 후 민주당 최고위원 및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 유세 가던 중 열차에서 뇌출혈로 안타깝게 서거했다.

영화인의 표본 영화배우 최은희는 1926년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남아야 했고, 어두운 여건에서도 영화를 찍고 제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살았다. 그녀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다. 50~60년대를 대표하는 최은희는 한국 영화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세’로 데뷔한 이래,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 제작했다. 이 중 한국 영화계의 전설인 남편 고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영화만 100편이 넘는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제1회 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상록수’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세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역시 그녀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세 번째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며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 ‘총각선생’ 등의 작품을 연출한 바 있다. 1978년에는 북한으로 납치 돼 9년간 억류되기도 했다. 이때 신상옥 감독과 재회해 영화를 찍고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화려한 영화사의 업적도 훌륭하지만 요즘처럼 스타의식이 팽배한 영화계에서 오직 온몸과 마음으로 예술혼을 불태우며 영화를 출연하고 제작한 그녀의 삶은 오늘날 영화인들의 표본이 되고 있다.

21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광주시 문화예술 융성을 위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광주의 인물을 만들고 광주의 문화예술 융성을 위해서 광주시 국회의원 자리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