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시월의 마지막 밤<광주문학-수필> 박성희

박성희

현대수필 2001년 등단
청춘수필집 ‘연지아씨’(2002)
인도사랑에세이 ‘나에게 마법 걸기’(2018)
광주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예창작반 수필강사

시월, 바람이 분다. 햇살이 따갑다.

바람은 나뭇가지와 내 머리칼을 후비고, 햇살은 과일과 곡식의 마지막 단맛을 위해 따갑게 쏜다. 하늘을 본다. 새파랗다. 두둥실 구름 떼가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놀고 있다.

나는 이 천국 같은 계절 시월이 좋다. 소녀 시절에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노란색과 보라색 들국화의 짙은 냄새에 빠져 있기를 좋아했고, 개울가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거닐기 좋아했고, 갈대숲을 헤치고 노란 은행나무 아래 발랑 누워 사색에 잠기길 좋아했다.

이 계절은 언제나 나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을 준다. 열여섯 살 소녀 시절부터 나는 이 무자비한 외로움과 그리움에 못 이겨 편지를 쓰곤 했다. 가을의 절정기이며 내 감수성의 절정인 시월의 마지막 밤마다 미지의 소년,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나의 한쪽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다.

편지지를 풀로 붙여 잇고 이어서 뱀처럼 길게 만들고, 잉크에 펜촉을 담그며 또박또박 편지를 썼다. 그날 밤 창밖에는 하얀 반달과 초록별이 쓸쓸히 떴고, 내 방에는 붉은 촛불이 암담하게 펄럭였다.

낮에 주워 온 빨강, 노랑, 주황, 갈색 단풍잎을 편지지에 붙이고 들국화 꽃을 꾹꾹 찍으며 내 달뜬 슬픔을 달랬다.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소년에게 온밤을 새며 편지를 썼다. 초는 어느새 촛농으로 범벅이 되고, 내 긴 편지글은 깨알같이 수놓아져 있었다. 소녀의 한숨과 눈물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스산한 바람소리를,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피 토하며 우는 소쩍새의 울음을, 밤새도록 잠 못 들고 뒤척이는 한 소녀의 탄식을. 마음 가누지 못하고 헤매는 혼란스러움을, 시를 읽어도 눈은 아주 먼 데 가 있는 어떤 소녀를 아느냐고.

누가 받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누가 사랑해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그대로 나 홀로 좋았다. 외로워서 좋았고, 그리워서 좋았다. 나만의 적막함이 좋았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향유하는 자체가 좋았다.

매년 가을은 돌아왔고 하늘연달 시월의 마지막 밤도 돌아왔다. 미지의 소년에게 편지를 쓴 세월들이 거듭될수록 이제는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절해져 갔다. 누군가 내 애인이 되는 날, 나는 그에게 그 편지를 주리라.

미지의 소년, 시월이면 언제나 느닷없이 내 가슴속에서 그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그에게 달려간다. 나는 민감한 소녀가 된다. 그는 언제까지나 내 처연한 외로움이며, 사무치는 그리움이며, 부치지 못하는 애달픈 편지다.

시월이 하루하루 지나간다. 내 젊은 날도 지나간다. 오늘이 지나간다.

바람이 내 몸속으로 점점 날카롭게 쳐들어온다. 감정도 바람에 베인다. 많이 쓰리다. 아프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자각자각 밟으며 산 중턱 어딘가에 있는 카페에 가고 싶다. 그곳에서 슬픈 곡조의 음악을 들으며 나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다. 서럽게 떠돌아다니는 방황의 날들을 이제는 정리하고 싶다. 처절한 고독도 그 쓸쓸한 공간에 꼭꼭 가두고 싶다.

그리고, 그를 만나고 싶다.

광주뉴스  gin5000@naver.com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주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