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 박사의 남한산성 산책로

서정욱 광주뉴스 국장(철학박사)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도리, 의무, 본분’ 등의 행동규범이 있다. 이것을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그의 분석 심리학에서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역할에 따라 썼다 벗었다하는 ‘가면’을 가리키던 말이 의미가 전용(轉用)되어 ‘사회적 역할’을 뜻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연극에서의 가면이 배우의 본모습이 아니듯이, 페르소나 역시 개인의 본모습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겉모습’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페르소나는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을 통해서 형성되고 강화된다. 모든 인간은 ‘사람 된 도리’로서, ‘직장인의 의무’로서, ‘학생의 본분’으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수행해야할 책임과 역할 등을 끊임없이 요구받게 되고, 그러면서 페르소나는 점차 강화되어 간다. 페르소나는 어떤 집단이 그 구성원들에게 만들어 준 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화폐처럼 특정 집단에 한해서만 유효하고 그 밖의 집단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에서의 도덕적 비난대상이, 다른 동양국가나 서양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 사회마다 형성되어 있는 페르소나가 각기 다르다는 뜻이 된다.

그렇지만 페르소나가 지역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공통적 관심사는 여전히 ‘공공선(公共善)’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공존적 존재(共存的 存在)이다. 이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과 함께 사회전체에 이익이 되는 공익추구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원활히 운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페르소나를 바탕으로,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도 포용해 가며 원만한 사회생활을 유지하되 공공선의 이탈은 자제하게 된다. 즉, 페르소나는 개인의 본모습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절충해 나감으로써 개인이 그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페르소나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목표와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동일시하여 그에 의존하여 살아가다보면, 자기의 본모습을 잃게 되고, 그것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융은 이러한 현상을 ‘페르소나 팽창’이라고 불렀다. 페르소나가 팽창한 사람들은 심한 열등감과 자책감, 혹은 과대망상으로까지 빠지기 쉽다. 그 단적인 사례가 ‘자살 행위’ 또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 사건’, ‘독선과 오만에 따른 독재’, ‘인권탄압과 말살’ 등이다.

지금까지 개인이나 집단들의 페르소나 팽창은 끔찍한 사건을 유발시키거나, 사회발전을 저해(沮害)해왔다. 특히 정치권에서의 페르소나 팽창은, 그 농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국민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르소나 팽창에 감염(?)된 자들에게는, 굳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 정신이자 요체인 공공선(common good)과 행복추구권을 침범했을 때, 국민의 이름으로 준엄한 심판이 뒤따랐다. 따라서 페르소나는 개인의 본모습과 사회 혹은 국가가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 절충적 성격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페르소나 즉,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페르소나의 팽창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으로서의 삶과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을 융은 ‘자기실현’이라고 표현했다. 자기실현은 인간의 본모습을 짓누르는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그 본성이 살아 숨 쉴 때 가능해진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고,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특히 인격 형성과정에 있는 청소년 시절에는 페르소나가 좀 더 적극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다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사회 집단이 요구하는 규격화된 태도와 역할에 지나치게 빠져 자기의 본 모습을 잃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