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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겨울이 봄으로 가려면<기고> 현광식 광주YMCA 지도교수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했던 말 중에 몇 가지가 귀에 들어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에 오시면 솔직히 걱정스러운 게 우리 교통이 불비(준비가 안 된)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습니다.” 그는 “평창 고속열차가 좋다더라”며 “남측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면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을 비교하면서 북한의 낙후된 인프라를 인정했다. 통 큰 것을 좋아한 아버지처럼 화끈한 말을 앞세울 줄 알았는데 회담 첫머리에 ‘북한이 잘 살지 못한다’는 쑥스러움을 내비쳤다. 북한 지도자의 솔직함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괴물로만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분위기다. “무력을 사용한다면 제 손으로 제 눈을 찌르겠습니까,” 그는 전쟁 의사가 없음을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도 내가 남쪽과 태평양으로 핵을 쏘거나 미국을 겨냥해 그럴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란 발언과 닿아 있다. 우리가 그동안 수 없이 추론했던 북한의 핵 개발 이유를 스스로 답한 셈이다. 핵과 미사일을 실제 쏘려고 만든게 아니라 반대급부를 얻는 게 목적이었다고 털어놨다. 핵을 사용하면 자신부터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이것이었다.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습니까.”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핵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는 ‘어렵게’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가공할 무기를 가졌는데 사는 게 어려워지는 건 경제 제재 때문이다. 서둘러 대화 테이블에 나온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해졌다.

제재는 위력을 발휘했고, 핵 개발에 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한 방법은 옳았다. 그것을 주장해 온 한국의 보수 진영은 지금 이렇게 말해야 한다. “거봐라 지금 내 말대로 되고 있지 않느냐!” 나는 얼마 전 강의에서 북한의 변화는 대화와 제재의 합작품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햇볕정책 10년, 압박정책 9년 만에 찾아온 북핵 해결의 기회는 절묘하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간의 계획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대북제재가 없었다면 속도전 하듯 이렇게 국제무대로 나오려 했을 리 없고, 지속적인 대화 주문이 없었다면 남쪽을 향해 성큼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테다. 김정은 위원장이 ‘어렵게’란 말은 제재를 받은 당사자가 제재의 효과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회담 성과의 절반은 이 땅의 보수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

국민은 항상 정치보다 앞서간다. 정성회담 이후 여론조사에서 결과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답변이 80%를 넘었다. 진보 진영의 비중만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보수적인 국민도 많은 수가 회담이 잘 됐다고 평가하며 향후 구체적 결과물을 기대하고 있다. 대북 압박과 제재를 주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그동안 내온 목소리에 문재인 정부는 세련된 모습으로 고마워하는 게 옳고 앞으로도 귀담아 듣는 게 맞다. 정치는 혼자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초당적 협의에 의한 판문점 선언 비준을 추진하고 있다. 보수 야당이 빠진 ‘반쪽 비준’은 안 하겠다고 방침을 정해 다행스럽다. 이 선언의 효력은 정권이 바뀌어도 유지돼야 한다. 문대통령과 여당이 치열하게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야당을 설득하기 바란다. 국민들은 다 보고 있다. 국회에 찾아가 설명하고 야당 대표와 만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요구를 반영해 초당적 비준을 반드시 성사시키면 좋겠다. 그것은 판문점 성과를 인정해준 보수진영 국민에게 예의를 갖추는 길이기도 하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공동대표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말했다. 적절한 시점에 앨프리드 마셜의 경구를 꺼내들었다. “완전한 비핵화가 문서화된 것은 높게 평가되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약속이 없다. 이제 시작이며 갈길이 멀다”고 했다. 뜨거운 가슴으로 대화할 때 누군가는 차가운 머리로 돌다리를 두드려봐야 한다.

문재인정부와 야당은 이런 역할 분담을 통해 평화의 길을 굴러가는 수레의 두 바퀴가 될 수 있다. 보수 정치권은 지금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과 전쟁해야 한다고 말해 온 게 아니지 않은가. 목표는 평화적 해결이었고 그것을 위해 제시한 보수의 방법론이 먹혀들었다. 평화 여정에 충분한 지분이 있음을 지지자들에게 당당히 설명하고 평가를 받아내라. 김태호, 남경필, 유정복, 하태경 등 이미 그렇게 방향을 잡은 이들이 보인다. 상대방이 못해야 내가 사는 낡은 정치를 벗어버리기 좋은 기회가 왔다.

한반도는 대전환의 초입에 들어섰다. 북핵이란 용어를 지우고 남북대결을 종식하려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초라한 말로 탓에 한국의 보수정치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지키려는 가치가 너무도 확고한 보수의 미덕은 그것을 위해 발휘하는 유연함에 있다. 보수 일각의 ‘반대를 위한 반대’를 뛰어넘어 이 미덕에 살아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한반도의 봄과 함께 ‘보수의 봄’도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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