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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님이 백성을 버리다<기고> 현광식 광주YMCA 지도교수

임금을 태운 어가가 돈의문을 지나 사현(지금의 무악재) 고개에 닿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려 성안을 바라보았더니 남대문 근처의 커다란 창고에 불이 나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고개를 넘어 석교에 도착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벽제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비가 더욱 거세져 일행 모두 옷이 젖었다. 혜음령(지금의 벽제리 부근 고개)을 넘을 무렵에는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다. 마산역을 지날 때,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임금의 몽진 행렬을 바라보더니 통곡하며 말했다.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5월 1일 저녁 무렵 임금의 몽진행렬은 개성에 닿았다. 이때 유성룡에게 영의정이 제수되었다.

유성룡에게는 하루해가 천년처럼 길고도 급박한 시절이었다. 제천정에 머물면서 한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왜적이 밀어닥치자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무기와 화포를 모두 강물 속에 버린 후 옷을 갈아입고 도망쳤다. 이로써 며칠째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던 왜적들은 이때다 싶어 민가와 관사를 헐고 그 재목을 이용해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 가운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꽤나 많았지만 강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다 건너갔다. 이로써 결국 세 갈래로 나뉘어 진격한 적은 모두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다. 1592년 5월 3일의 일이었다.

5월 3일 수도 한양이 함락되자, 임금의 몽진행렬은 4일 다시 길을 떠나, 5일 안성·용천·검수역을 지나 봉산군에 다다랐으며, 6일에는 황주, 7일에는 중화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부원수 신각(申恪)은 왜적의 한강도하를 방임했던 도원수 김명원의 부장(副將)이었다.

그런데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양주로 가서 민가를 약탈하던 왜적 70여 명을 격퇴시켰다. 이야말로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후 처음으로 맞서 승리한 싸움이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감격해 환호했다. 정작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거둔 신각은 도망친 도원수 김명원의 무고로 죽임을 당한다.

무기와 화포를 강에 버리고 장군복을 갈아입고 도망쳤던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에서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 이렇게 썼다. “신각이 제멋대로 다른 곳으로 가는 등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의정 유홍은 이 글을 읽은 대로 임금께 보고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을 파견했는데, 마침 그때 신각의 승리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선전관을 뒤쫓도록 했으나 이미 선전관의 손에 신각이 죽은 후였다.

적장 가운데는 가토 기요마사가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에도 능했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 안성역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둘은 제비뽑기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가기로 결정했다. 적이 함경도까지 들어오면서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 도한 적에게 사로잡혔다.

당시 왜적은 왕자들의 뒤를 계속 쫓았는데 이때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던 관리와 그 가족들을 붙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겼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있던 선조의 장자 임해군은 자신이 풀려나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디든지 왜국의 요구대로 떼어주겠다고 까지 했다. 

당시 세자 0순위였던 임해군이 자기 한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기는커녕 적장에게 나라 절반을 떼어줄 테니 목숨만 부지해달라고 구걸했던 것이다. 수치스럽고 절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592년 6월 11일 선조는 평양을 떠나 영변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선조의 몽진 행렬이 평양성을 버리고 나갈 때, 백성들은 손에 무기와 몽둥이를 든 채 이렇게 분노하며 울부짖었다. “너희들이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 “평양성을 버리고 갈 거면 왜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소? 이야말로 우리를 속여 적의 손에 넘겨주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임금이 평양을 떠난 뒤, 민심이 험악해져 곳곳에서 난민들이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해 순안·숙천·안주·영변·박천의 창고가 다 털렸다. 평양성 앞에까지 진군한 왜적들은 모란봉에 올라 오랫동안 성을 관찰했다. 드디어 성이 비어 있음을 알게 된 적군은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한편 임금이 평양성에 거할 때, 식량 부족을 걱정한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전세(나라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를 평양으로 옮겨두었었다. 그 양이 무려 10만 석이 넘었는데 그것 또한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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