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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하는 조정, 파죽지세의 왜군<기고> 현광식 광주YMCA 지도교수

왜적의 침략 사실이 처음 조정에 닿은 것은 4월 17일 이른 아침이었다. 부산성을 버리고 도망쳤던 경상 좌수사 박홍의 장계(狀啓, 지방의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가 처음 전해진 것이다. 대신들과 비변사가 모두 빈청에 모여 임금을 뵙고자 했다. 그러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상도 순변사에 임명된 이일이 병사 300명을 선발해 내려가려 했으나, 병조에서 선발한 대부분 집에서 빈둥거리던 사람들이거나 아전 도는 유생들뿐이었다. 불러 모아 점검을 해보자 관복을 입고 옆에 책을 낀 채로 나온 유생, 평정건(平頂巾, 각 사司의 서리가 머리에 쓰던 두건 모양의 관모)을 쓰고 나온 아전 등 모두들 병사로 뽑히기를 꺼리는 자들로 들이 가득 찼다. 이런 까닭에 사흘이 지나도록 이일은 전장으로 떠날 수조차 없었다.

며칠이 더 지나서야 순번사 이일은 문경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을은 텅 비어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수 관청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꺼내 함께 한 병사들에게 나눠주어 먹게 했다. 그런 후 함창을 거쳐 상주에 닿았다. 상주에서 왜군과 처음 맞닥뜨린 이일은 크게 패했다.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 순변사 이일은 자신의 신분이 적에게 드러날까 두려워 말을 버리고 의복도 벗어던진 채 머리도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경상도 순변사 이일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성안 민심은 흉흉해졌다. 조정에서도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피난하는 것)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임금도 교지를 내렸다. “종묘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제야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왜군은 상륙한지 불과 10일 만에 상주까지 닿았다. 사실 상주에 진입한 적들은 험한 지형을 거쳐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매우 불안해했다. 문경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고모성이라는 옛 성이 있었다. 이곳은 동부와 서부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양쪽의 산벼랑은 매우 날카롭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흘렀으며, 길은 그 아래로 나 있는 험준한 곳이었다. 적들은 이곳에 우리 병사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척후병을 보내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키는 병사가 없음을 알게 되자 신이 나서 지나왔다고 한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 조령(鳥齡, 새재)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엣 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애초에 신립은 조령을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일의 패전 소식을 접하자 그만 낙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시립은 탄금개 앞을 흐르는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곳은 좌우에 논이 있고 풀도 우거져 말과 사람이 움직이기에도 어려웠다. 한마디로 패착이었다. 결국 왜적이 충주에 진입하자, 신립은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비록 패장이었지만 그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조선의 장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버렸다.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후 20여 일 동안 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한강도하 과정에서도 막아서는 자가없었다. 그만큼 파죽지세였다. 거의 걷는 속도 그대로의 진격이었다.

왜군은 동래로부터 세 갈래로 나뉘어 올라왔다. 한 갈래는 양산·밀양·청도·대구·안동·선산을 거쳐 상주에서 이일의 부대를 물리쳤다. 또 한 갈래는 장기·기장을 거쳐 좌도 병영인 울산·경주·영천·신녕·의홍·군위·비안을 함락시킨 후 용궁과 하풍진 나루를 거쳐 문경으로 온 후 가운데 길로 온 부대와 합세하여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갔다.

충주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진격했는데, 한 갈래는 여주를 거쳐 강을 건넌 다음 양근·용진을 거쳐 서울 동부로 들어왔다. 또 한 갈래는 주산·용인을 거쳐 한강 남부로 들어온 것이다. 마지막 한 갈래는 김해·성주·무계현을 거쳐 강을 건넌 후 지례, 금산을 지나 영동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청주를 함락시킨 다음 경기도를 향한 것이다.

신립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적이 금명간 한양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이일의 장계가 도착하자 얼마 안 있어 임금의 가마가 대궐을 빠져나갔다. 이때가 임진년 1592년 4월 30일 새벽이었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꼭 17일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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