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의 에니메이션 <포카혼타스>가 1995년 개봉됨으로서 아메리카 원주민 처녀 포카혼타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물론 포카혼타스는 17세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영화 내용을 대충 간추려보면 인디언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전쟁을 막는 평화주의자이자 첫눈에 반한 백인청년 존 스미스와 애절한 사랑에 눈물짓는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 기반했다는 이 영화의 역사 진술은 진실일까?
포카혼타스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이영재著․웅진출판) >을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의 역사 진술이 진실이냐에 대한 물음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 스미스, 포카혼타스, 그리고 포와탄(포카혼타스 아버지) 등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이 수백 년 전 미국 동부 해안지역에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한 나머지 상황 설정은 모두 허구이다.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가 열애를 나눈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애는 백인과 인디언의 평화 대신에 인디언 멸망사를 예고한 것에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카혼타스>의 “역사 왜곡”은 존 스미스에 의해 빌미가 제공되는데, 존 스미스는 영국인으로서 모험가이자 사업가일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도 여러 책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최초로 아메리카 영국 정착촌인 제임스 타운(후에 버지니아주)을 세울 목적으로 1607년 출발한 영국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1608~1609년까지 1년간 제임스 타운 대표로서 상당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라는 유명한 말도 그때 남겼다. 그리고 그는 1609년 제임스 타운이 화재로 불타자 영국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아메리카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그가 포카혼타스와의 극적인 만남을 여행 기록이랍시고 남겼는데, 제임스 타운을 공격한 포와탄 부족이 그를 납치했고 죽음의 위기를 맞은 그를 포카혼타스가 눈물로 호소해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영화 <포카혼타스>는 만들어졌고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두 사람을 아예 연인 사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존 스미스의 그녀와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도 역사가들은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영국으로 돌아간지 수년 후에 포카혼타스는 제임스 타운에 인디언측 협상 대표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추측되는데다가 당시 백인은 보다 유리한 협상을 위해 그녀를 납치 억류했는데, 뜻밖에 그녀가 제임스 타운에 놀라운 적응력을 보였고 그녀는 또 백인 남자 존 롤프와 결혼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 영국으로 가게 됐다. 그러자 놀랍게 변신한 그녀를 영국에서는 공주 신분으로 극진히 환대했다. 말하자면 영국은 그녀를 인디언과 백인간에 평화의 상징으로 떠받들 필요성이 있었고 그 덕분에 그녀는 전 유럽에 유명세를 떨쳤다. 그런데 존 스미스는 그처럼 유명해진 그녀 생전에는 가만히 있다가 그녀가 22살의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죽은지 7년이 지나서야 느닷없이 그녀와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는 여행일기를 발표한 것이다. 이렇게 발표한 시점이 애매하고 진술의 일관성도 없기 때문에 그의 술회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존 스미스는 물론 영화의 허구성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영국에 의해 그녀가 인디언과 백인사이에 평화의 상징으로 조작된 것을 현대인들에게 은폐하는데 한몫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영국은 그녀를 평화의 천사로 추켜세우는 이면에 아메리카 현지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거의 씨를 말릴 만큼 학살극을 벌였다.

인디언들의 비극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소위 말하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0월 12일, 미국 국경일)”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발견’이라는 용어를 쓴 자체도 하나의 넌센스다. 원래 발견이란 “남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사물을 찾아냄”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수만 년 전부터 살아온 1600만에 달하는 인디오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말이다. 혹자는 인디오가 워낙 미개인이기 때문에 ‘발견’이란 말을 써도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멕시코에 터를 잡은 마야와 이스테카 그리고 페루의 잉카 문명은 서구의 어떠한 문명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역사가는 없다. 즉 그들을 미개인 운운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당자자격인 서구는 물론 제 3자격인 우리들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알고 있다. 이는 다름이 아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작업이 노골화되고 있다. 수천 년간 이의를 달지 않다가 그야말로 느닷없이 한국 역사를 신라에 국한시키고 고구려는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저의는 뻔하다. 우리 나라가 통일될 때를 대비하여 국경 분쟁을 사전에 차단함과 함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포석인 것이다.

그들의 저의가 어쨌거나 얼토당토 않는 주장에 대응해야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분통 터질 일이다. 그러나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한다. 역사는 냉엄하다. 자칫하다간 먼 훗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인디오처럼 “고구려는 우리 역사였는데…”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듯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넋두리를 우리들끼리 해야되는 비극적인 날이 옷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 1961년 5월 생
월간 녹색지대 前 편집장 * 역사·무협 소설가
장편 「황하(3권)」 「刀劍天下(6권)」등이 있고
단편 「누렁이」「보금자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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