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역사는 현재학이자 미래학이다.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역사를 과거학으로만 여긴다는 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단지 과거에만 머무르는 과거학이 아니다. 조선의 동국통감이나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처럼 역사서에 감(鑑) 거울감 자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역사는 현재학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조망한다는 점에서는 미래학이다. 역사의 정점은 일정한 시기를 두고 정확하리만큼 되돌아온다. 태종이나 세조처럼 악역을 자처한 임금,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들, 선조나 인조와 같이 큰 전란을 겪은 임금들이 있듯이 우리의 역사는 정확하리만큼 사이클을 그린다.

성공한 군주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역사서 애독이었다는 점은 당연하다. 성공한 군주들은 과거 역사에서 현재의 산재한 현안을 푸는 지혜를 얻으려 했고, 그런 의도는 상당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악역을 자처했던 태종도 다른 군주처럼 성군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태종은 양인과 천민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신분은 부친을 따르게 하는 종부법을 시행해 많은 노비를 양인으로 상승 시켰다. 대부분의 노비들이 양인 부친과 천인 모친 사이에서 탄생했으므로 종부법은 노비 숫자를 감소시키고 양인 숫자를 늘릴 수 있는 획기적인 법안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혁명무력과 혁명사상의 결합으로 역성혁명파가 개국명분으로 삼은 고려말 문란한 토지문제 해결이었다. 당시에도 양극화현상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토호들은 남의 땅을 병합해 밭둑이 많아진 반면 빈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빈자들은 남의 땅을 빌려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해도 밥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역성혁명은 당시 문란했던 토지제도를 정도전의 과전법시행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새 왕조 개창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과거의 토지문서를 개경시가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는데 사흘동안이나 탔다고 전해진다. 기득권층들은 선왕들이 만든 토지제도가 크게 바뀌니 안타까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다니 지키는 자와 혁명을 하는 자의 들 사이에는 큰 회오리가 일게 마련이다. 이성계를 탄핵하려던 정몽주는 결국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제거되었다. 정몽주를 제거했기에 이성계는 석 달 후 개국시조가 될 수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사람들이 자신을 모진 남편, 모진 사위라고 수군거리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처남 넷이 죽었다. 그러나 태종은 그것이 하늘이 명한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태종은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 그것이 신생 조선에 꼭 필요한 군주의 역할이라고 태종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악역을 맡아야 조선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는 현재 사회가 조선시대를 계승한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에도 만연한 문중 의식과 족보를 중시하는 경향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선시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역사 인식이 조선 사관들의 가치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산군이다 연산군일기를 남긴 사관들은 연산군을 황음무도한 인물로 그려놓음으로써 신하로서 군주를 쫒아내고 죽인 불충을 합리화 했다. 

연산군이 실제로 황음무도한 군주였다는 실제 증거는 거의 없음에도 조선 사관들이 덧칠한 가치관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들과 사료를 남긴 사람들의 가치관을 분리해서 인식해야만 과거 사람들의 행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제 우리 사회도 21세기에 걸맞은 역사학과 군주학이 필요하다. 거울역할을 하는 역사학과 군주학이 성립된다면 이를 통해 개인과 조직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 시대를 읽는 혜안과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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