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려는 원래 월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남방의 패권국인 오나라에 눌려 망하기 직전인 월나라를 부국강병하여 오히려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를 남방의 패권국으로 올려놓은 걸출한 영웅이었다.

그런데 범려는 월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들어놓고 보니 월왕 구천의 인간 됨됨이가 좋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월나라 부국강병에 힘썼던 대부종에게 찾아가서 월나라에서 도망가자는 제의를 했다. 깜짝놀란 대부종은,

“무슨 말이오? 우리는 약소국 월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들어 놓은 일등 공신인데 도망가자니 말이 되오?”

범려는 말했다.

“월왕은 인내심은 강하나 잔인하고 각박한 사람이오. 아쉬울 때는 저자세를 취하지만 목적이 이루어지면 냉혹한 사람입니다. 결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니오. 결국 우리를 죽일 것이오.”
“그렇다고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오.”

하면서 범려는 몇 번이고 함께 도망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대부종은 월왕이 그럴 리가 없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범려는 단념하고 자신 가족들만 데리고 제나라로 떠났다.(훗날 그의 예견대로 대부종은 월왕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

제나라로 건너간 범려는 본명을 숨기고 치이자피라고 이름을 바꾸고 해안에 연못을 파 물고기를 양식하고 땅을 일구어 양식과 가축을 길렀다. 그리하여 재산을 순식간에 불렸는데 도주의돈지부(陶朱猗頓之富 : 썩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부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원체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자라는 소문이 돌자말자 제나라에서는 그의 정체를 알고 다짜고짜 재상으로 임명해 버렸다.

그러자 그는 환급할 수 없는 재산은 주위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조나라로 도망가버렸다. 조나라에서 다시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시작한 그는 얼마가지 않아 또다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혜안이 뛰어난 그는 장사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초나라에 간 차남이 그곳에서 살인죄로 투옥되었다는 전갈이 온 것이다. 그대로 두면 차남은 곧 참수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범려는 고민 끝에 황금 천돈을 항아리에 넣어 삼남(막내)에게 초나라로 가서 차남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장남이 항의하고 나섰다. 당연히 자신이 가서 동생을 구해야지 막내를 보내다니 말이 되느냐, 장남이 이토록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거품을 물었다.

장남이 정말 자살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범려는 어쩔 수 없이 장남하여금 초나라로 가게 했다.

초나라에는 장생이라는 범려의 친구가 있었다. 물론 장생은 범려가 이름을 바꾼 부자로서 사귄 친구였기 때문에 범려의 진면목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범려는 장생에게 서찰을 쓰고 장남에게 부탁했다.

“인사를 마치면 아무 말 없이 이 서찰과 항아리를 그에게 건네주어라.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고 참견해서도 안되며 그가 지시하는 데로 따르도록 해라.”

하고 다짐했다.
장남은 초나라에 가서 장생을 만났다. 그런데 장생은 초라한 집에서 살뿐만 아니라 아무리 봐도 볼품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친의 다짐이 있었기 때문에 장남은 서찰과 항아리를 장생에게 주었다. 장생은,

“집에 가서 기다리시오. 조만간 동생이 나올 게요.”

장생이 동생은 곧 풀려날 거라고 했지만 장남은 미덥지가 못했다. 그래서 객관에 머물면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고관들 연줄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고관과 선이 닿아 뇌물을 주고 동생 석방을 부탁했다.

과연 뇌물을 준 효과가 있어서 고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초나라 조정에서 곧 대사면이 있는데 그때 동생이 풀려날 거라는 전갈이었다.

장남은 곧바로 장생에게 찾아가서 그 이야기를 하고 황금 천돈이 든 항아리를 되돌려 받았다. 그리고 객관에서 동생이 풀려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는 광장에서 참수가 있다고 해서 나가보니 놀랍게도 목이 잘린 죄수는 동생이었다. 부친 말을 듣지 않은 결과였고 장남은 뒤늦게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사실 대사면은 장생이 왕에게 건의한 것이었다. 장생은 평소 사리사욕이 없고 빈민구제에 힘쓰는 사람으로서 초나라에서는 상당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사면을 청원했으니 왕은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장남이 뇌물을 썼다는 소리를 들은 장생은 사면을 취하할 것을 왕에게 다시 고한 것이었다. 관리들의 부패를 그냥 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받은 황금은 빈민 구제용으로 받았던 거고.

범려는 결국 장남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차남을 구하진 못했지만 차남을 구할 협상 통로는 정확히 짚고 있었던 셈이다.

지난주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충격을 받았을 김선일씨 사건이 있었다.

미국 내에서도 이라크 침공은 잘못된 전쟁이라는 인식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는 형편에 우리 나라 정부는 보부도 당당히 대규모 추가파병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이라크 내의 정보는 거의 깡통 수준임을 이번 김선일씨 사건에서 유감없이 보여줬다. 어떻게 미국 영국에 이은 세 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하려고 하면서 현지 사정에 그토록 어두울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국민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있는데 파병철회 불가라고 배짱 좋게 못박은 이유는 또 뭔가?

아무래도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의 눈치보기에 급급한 무대뽀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국익인가?

효월 약력
* 1961년 5월 생 * 월간 녹색지대 前 편집장 * 역사·무협 소설가
장편 「황하(3권)」 「刀劍天下(6권)」등이 있고
단편 「누렁이」「보금자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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