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태종태세문단세를 외우고 연 도표에 밑줄을 그어가며 외웠던 역사과목, 암기과목의 일 순위였다. 미리 공부해야 소용없었다. 벼락치기에 딱 맞는 과목 하지만 한권의 조선왕조실록으로는 500년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뜻밖의 한국사에서는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재현해본다. ‘점잖은 양반의 상투 튼 머리는 한여름에 얼마나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을까’, ‘선비의 아내들은 남편의 바람기에 어떻게 복수를 했을까’와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들, 역사가 재미있어 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무려 600여년 동안 많은 한국인들이 60일에 한번씩 밤을 새워 놀았다는 이야기를 모른 채 그 시대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공부했다는 서당에서 어떤 교과서가 있었고, 훈장은 월급을 얼마나 받았는지, 1555년 삼월 삼짇날 아침에 한양 성문 밖 초가집에 살던 농부 모모씨의 하루를 완벽하게 재생해보고 싶다.

우리가 기억하면 과거가 비로소 역사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 왜 한국인만 시집간 여자가 성을 바꾸지 않을까?, 조선시대까진 남자들도 귀를 뚫고 귀고리를 했다. 조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벼슬자리는?, 돈이 없어 혼인을 못하면 국가가 보조금을 줬다 등 다양한 당시의 삶을 되짚어 보며 그 시대에는 과연 그러한 우리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는 서류부가 즉 사위가 부인의 집에 머무는 관행에 대해 서술해 놓았다. 혼인이 결정되면 신부집에서는 집 뒤에 작은 서옥(사위집)을 지었다. 혼인을 청하면 부모는 허락하고 신랑과 시부는 그 서옥에서 첫날밤을 치른다. 신랑은 다음 날 일단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처가와 본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고 신부는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서 살다가 시댁으로 갔다. 

고려시대에도 자식이 출생하여 성장할 때까지 처가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신라시대에도 혼인해서도 신부가 시댁에 가지 않고 신랑과 함께 친정에서 함께 사는 전통은 나라에서도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대략 1500년 이상 한국 남자는 처가살이를 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처가살이 전통을 바꾼 것은 유교였다. 조선의 양반들이 성자처럼 받든 주자가 만든 가정의례집 ‘가례’에는 신랑이 자기 집에서 신부를 맞이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천수백년동안 이어진 처가살이의 전통과 유교의 규정이 맞지 않아 이 문제는 조선초기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처가살이의 전통을 혁파하기 위해 ‘가례’에 이른 대로 신랑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친영(親迎)이라고 한다. 이 관습은 백성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조선 초부터 왕실이나 대신들이 끊임없이 주장했기에 점차 변형된 형태로 수용되었다.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은 없어지고 길어야 몇 년 정도 처가에서 살거나 부인은 처가에 두고 남편은 본가에 오고가기도 했다. 율곡 이이가 어머니 사임당의 고향인 강릉에서 태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임당은 열아홉에 혼인을 했지만 시집 살림을 도맡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온 것은 서른여덟 살 때였다. 사임당의 친정어머니 또한 혼인 후에도 친정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사임당도 어린 시절 내내 외가에서 자랐다. 

16세기 말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처가살이의 전통은 점차 사라졌다. 혼례도 반친영이라 하여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르되 사흘만 묵고 신랑집으로 갔다. 새 색시들의 혹독한 시집살이는 이때부터 본격화한 것이다.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 년, 벙어리 삼 년을 죽은 듯이 지내야 했던 조선 중기 이후의 여성들은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을 원망했어야 할까? 역사 속에 담겨있던 우리의 삶을 배우는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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