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우리 향봉(香峰)스님은 참답고 뚝배기처럼 질박하다. 또 정의를 위해서는 불같은 짐승이 된다. 그의 자유분방한 시혼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무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향봉스님의 뛰어난 시심과 그리고 그의 풍부한 인간성을 사랑한다(고은) 40년 가까이 된 책이다. 

누렇게 변한 종이는 세월을 짚어보게 하지만 그의 글에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지표를 알려주고 있다. 세월은 변하지만 진실만은 영원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진실한 사랑은 용서라는 큰 밭이 있어야 한다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가르쳐 준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일 뿐 자동차 타이어처럼 스페어가 있을 수 없다. 

청춘은 인생의 한 과정일 뿐 청춘 그자체가 영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피도 세월이 가면 삭아 내리기 마련이요 용기와 집념과 건강도 나이가 들면 두렵고 외로워 흔들리기 마련이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까싶어 괜스레 세상이 적막해옴을 뼈끝으로 느끼기 마련이요 미운자도 보내고 나면 울컥 서러워지듯 울적해지기 마련이다. 

얼마나 살겠다고 주위의 눈치코치에 얽매어 윤리니 도덕이니 권위려니 체면이니 앞세워 전당잡히고 도난당하듯 젊음을 깡그리 증발시킨 지난날의 바보스런 몸짓에 섬뜩 놀라, 스스로의 비틀거리는 그림자를 안쓰럽게 일으켜 세우며 청교도적인 삶에 위안과 긍지를 삼으려는 분들도 있을 줄 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일 뿐 두 개일 수 없다.

오로지 이 하나뿐인 생명을 위하여 타인들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율로 만끽하며 가슴을 펴고 살 일이다. 젊음은 결코 우리에게서 영원토록 머물러 주질 않다. 젊은 시절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아야하고 이루어야하고 주인으로써의 높은 고지를 정복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자유만끽이란 결코 행동의 무질서나 정신의 무절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던 하면 된다는 굳센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집념으로 용기백배하여 큰 기침을 하며 살 일이다. 돈의 무게에 눌리고 권력과 배경에 찌들어 마른오징어 닮은 인생을 기어 다니며 살게 아니라 젊음은 온 우주의 주인이요 우리들 자신이 곧 일체를 창조할 수 있는 창조 주의로써 긍지를 십분 발휘해 호호탕탕히 살 일이다.

백범선생님 말씀처럼 “태산을 움켜쥐니 손바닥에서 호랑이가 울고 사해(四海)를 들이키니 배꼽부근에서 고래가 논다”는 시원스런 말씀을 길이 좌우명으로 삼아 웅지의 날개와 지느러미를 달아 시원통쾌하게 살 일이다.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연극무대요 인생살이 자체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짙다. 

그러나 별게 아닌데도 이별은 죽음보다도 더욱 슬프고 사랑은 생명보다도 더욱 깊게만 보인다. 그리움은 화두 되어 뼈에 박히고 지난날은 사리(舍利)보다도 더욱 빛나게 보일 때가 있다. 젊은 시절을 가장 아름답게 가장 씩씩하게 가장 진실 되게 역어가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살 일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 햇빛의 고마움을 마냥 잊고 살듯이 우리들에 있어 가장소중하고 귀중한 생명의 고마움과 사랑에의 깊이와 넓이를 쉬 잊거나 잘못측정 계산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민주의 초원에서 사회의 고마움과 부모, 친척, 친우들의 도움 속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다보면 생명의 존중함과 사랑에의 가치관을 망각하고 각기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에 만족하여 음율이 신통하게도 고루 엉망인 태평가를 음치인 목소리로 꼴사납게 부르고 있을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자가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탄광의 매연과 독가스에서 생활하는 자가 공기의 고마움을 알며 암흑 속에 갇혔던 자가 햇살의 고마움을 알게 되듯이 사랑의 쓰라림과 고통과 번민에의 진통을 겪음으로써, 그리고 병들어 신음하면서 죽음가까이 접어드는 전율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에 입맞춤을 두어번 연습해본 자만이 생명에의 존귀함을 알게 됨과 같은 것이다.

소박하고 용기 있는 이향봉스님의 철학이 우리에게 큰 빛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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