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1998년 IMF로 온 국민이 침체에 빠져있을 때 미국에서 낭보가 전해온다. 맨발로 연못에 한발을 담그고 쳐올린 골프공이 깃대를 향했고 최초의 US오픈 대회에 우승을 했던 박세리를 국민은 기억한다.

단지 우승이라는 결과물도 중요했지만 이후 대한민국 여자골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시작이었다. 경제적 가치가 수조원이었다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 이후 18년이 지난 박세리 키즈로 이어진 한국낭자들의 위력은 가히 대단하다. 세계대회의 3분의 2이상을 우승 및 1,2,3위로 이끌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정신이요 도전과 모험을 이겨내는 극치일 것이다.

시대는 100년전 대한제국은 이제 나락으로 떨어지며 모든 국권을 일본에 내주고 온 국민이 실의에 있을 때 만주하얼빈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본의 이토가 만주까지 야망을 가지며 순행차 방문했던 하얼빈역에서 심장을 관통하는 총성에 고꾸라졌다. 비록 대한제국, 나라를 빼앗았지만 국민의 정신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안중근 그는 대한제국 국민의 통탄의 얼을 모아 이토의 심장에 총알을 박은 영웅이었다. 누가 아랴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철통같은 감시망을 뚫고 총렬에 대한제국 백성의 한을 담은 총성이었다.

1909년 12월 23일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가 서거하자 이날 아침 서울 명동 성당에서는 레오폴드 2세 추도미사가 거행되었다. 그 자리에는 서울의 각국 외교 사절을 비롯하여 한일 양국의 고관들이 참석해 있었다.

11시 30분경 추도미사가 끝나자 총리대신 이완용은 곧바로 성당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탄 호위순사 2명이 앞뒤를 경호하는 가운데 이완용의 인력거가 막 성당 앞 동쪽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기 시작할 때였다. 전봇대 옆에서 군밤장사를 하고 있던 청년 하나가 비호같이 이완용이 타고 있는 인력거 위로 뛰어올랐다. 순간, 인력거는 비탈길에 뒤집혀진 채 이완용은 청년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젊은 자객을 가로막고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 역시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청년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이완용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이완용의 호위순사 미야다케와 이한철의 칼을 맞고 체포당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이재명(李在明) 그때 나이 겨우 20세였다.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자랐으며 14세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18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얼마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이재명은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자기도 안중근과 같은 큰일을 하고 죽을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멀지 않아 한일합방이 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이완용이 이토의 시신을 따라다니며 추태를 부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단지동맹을 할 때 이토뿐 아니라 이완용까지 죽이기로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재명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말했다. “안중근의사께서는 미처 한가지 일을 못하시고 붙잡히셨습니다. 필경 안중근 의사께서는 멀지 않아 돌아가실 터인즉,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그 일을 해 드려 안중근 의사께서 기뻐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완용을 죽여 옥중의 안중근을 위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안 의사를 위하려면 이완용이란 놈의 염통을 딴 피가 필요합니다.” 이완용을 죽이기로 결심을 하고 서울로 잠입한 이재명은 이완용이 이날 레오폴드2세 추도미사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틀 전부터 명동 성당 앞에서 군밤장사를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영토를 빼앗고 국권을 약탈하면 그것이 바로 일본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대한제국의 백성들의 영혼과 정신은 절대 빼앗을 수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끈질긴 대한제국의 국민을 일본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의 식민지화 했지만 한국인의 저항에는 그들도 결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의 과정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그냥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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