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최병길 前광주로타리클럽 회장

고종은 흐르는 눈물을 주제 못한 채 탄식을 했다. “못할 일이로다. 짐은 이제 제왕이 아니로다. 한낱 허수아비야. 짐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자가 아무도 없구나. 국권은 고사하고 신하마저 그자들에게 도적맞았으니 원통할 뿐이로구나.” 일제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의 책임은 엄밀히 따져볼 때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5적의 적극적인 호응과 민영기와 이하영의 소극적인 반대, 이재극의 침묵과 방관에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책임은 이토에게 내각대신들과 상의 하라고 한 고종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있었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국이 주장하고 있는 전문5조로 된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라 일컫는 조약문서사 공포되자, 대한문 밖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 치욕의 문서가 칙재되는 것을 백성들을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말인가? 궐문 앞을 향해서 수천 군중이 길을 매춘 채 혹은 통곡하고 혹은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폐하 을사5조약을 즉각 폐기 하시옵소서!” “매국적5대신을 타도하자” 민심은 천심이라던가! 이 함성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상가는 모두 철시했고, 학교는 수업을 중단한 채 선생과 학생들은 통곡을 하고 교회당으로 몰리는 신도들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덕수궁 함녕전 고종 앞으로는 피맺힌 우극의 상소문이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그중에서는 전 호조참판 최익현의 칼날 같은 상소문은 고종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이제 폐하께서는 박제순 이하 5적의 목을 베어 그 매국의 죄를 밝히시고 또 각국 공사관에 의뢰하여 일본의 치강능약(治强能弱)하는 죄를 성토하셔야 합니다. 그 길만이 폐하의 심지와 백성의 청원을 각국에 알리시고 분발, 직작, 망(亡)을 전하여 존(存)을 얻고 사(死)를 회하여 생(生)을 얻을 수 있사오리다. -중략- 폐하, 신은 병마에 시달리는 늙은 몸으로 폐하를  뵙지 못하고 북향사배하고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이 글월을 올리오니 폐하께옵서는 한낱 추사의 신이 넋 없이 지껄이는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옵고 5개항의 굴욕적인 조약을 폐기하셔서 이 나라를 길이 보존케 하시옵소서. 통곡하여 비올뿐이옵니다.” 111년전 조선의 왕도 울었고 백성도 울었다. 한 나라가 통째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수치의 해였다. 구국의 신하는 없었다.

다만 일본의 협잡에 앞장선 괴뢰 같은 매국노들만 이토히로부미를 앞에 두고 있었다. 경복궁에서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멸족 같은 일본 놈들이 싫어 덕수궁 함녕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이 일본의 협잡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토의 치밀하고 간약한 간사에 조선은 치를 떨었다. 당시 매국의 한에 앞장선 5적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1.학부대신 이완용, 2.내무대신 이지용. 3.외부대신 박제순. 4.군부대신 이근택. 5.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어느놈 하나 덜하고 더한 놈이 없다.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외교권을 넘기고 군부조직을 통째로 넘겨주었던 을사5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토는 일찍이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의 새로운 문화와 세계의 흐름을 깨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명치유신의 선봉자로 천왕의 신뢰를 받던 일인자였다.

왜 하필이면 이토가 조선을 관장하는 대표로 왔을까?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영국과 미국의 힘을 얻어 초강대국이었던 러시아함대를 초토화 시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것이다. 엄청난 군비, 희생자에 대한 국민의 전리품이 없었다고 생각한 일본천황은 청나라와 러시아 진출의 요지인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을사보호라는 미명아래 침략과 찬탈이 아닌 명분으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음모는 결국 조선인의 강한 반발로 이어지며 36년이라는 수난의 시대로 접어든다.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왜 당시에 삼면이 바다인 해양강국인 조선이 무방비했는지, 나라를 세우고 지키던 충절의 충신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시의 시대상 우리가 겪었던 아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랬는지를 되새기는 것이 역사라고 본다.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일제의 만행을 잊지 않은 선대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안부 문제, 징용에 끌려갔던 분들이 아직도 살아있다.

을사늑약이후 전국에는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펼쳐지는 시기였다. 조선을 우습게 알았던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구국의 총탄에 야욕을 품었던 심장에서 붉은 피를 쏟으며 거꾸러지며 조선인의 얼에는 절대 일본에 속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대한민국의 절대의지가 불타게 된다.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