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환회 NH협동기획 대표

춘분이 막 지나서인지 아침이지만 날씨가 완연한 봄날이다. 뜰 앞의 꽃나무들이 며칠 후 자태를 보이기 위하여 마지막 꽃망울을 정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새롭다. 오늘은 엄미리에서 격년별로 음력 2월의 첫 일요일에 열리는 장승제가 있는 날이다.

이를테면 비엔날레이다. 서울을 지척에 두고 있는 곳에서 아직도 장승을 세우는 곳이 있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엄미리 장승제는 350년 역사를 가지고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마을의 공동제사 겸 축제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행사다.

이때에는 출향해서 타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다 모인다. 광주시청에서 서울 쪽으로 10km정도가면 하남시와 경계를 이루는 은고개가 나오는데 그 곳이 바로 엄미리이다. 엄미리는 은고개의 한자지명인 엄현(俺峴)과 미라울(尾羅洞)이 합쳐져서 엄미리라는 지명이 된 곳으로 1917년 이전까지 조선시대에는 광주유수부가, 일제 강점기에는 광주군청이 있던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주요길목이었다. 장승은 마을의 안전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지만 멀리 삼남지방에서 상경하는 길손들에게는 이정표의 구실도 해왔다.

하남시와 경계인 은고개에 도착하니 큰 도로 길가로 상징물로 만든 장승들이 아무나 범접하면 안 되는 곳인 양 눈을 부릅뜨고 맞이한다. 고개 마루에서 좌측 계곡안길로 2km정도 들어가니 진짜 장승이 서있는 미라울 동네 어귀가 나왔다.

아침 10시가 채 안됐는데도 벌써 마을 사람들이 장승으로 쓸 굵기가 30cm는 넘어 보이는 오리나무 기둥을 다듬고 있고 부녀회원들은 술과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엄미리에서는 꼭 뒷산에서 자란 오리나무를 쓴다.

재질이 부드럽고 빨리 썩기 때문이다. 전국각지에서 민속학자들과 학생들도 많이 와서 현장을 스케치하고 자료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장승목은 모두 네 개를 만들고 있었다. 두개는 남성을 상징하는 "천하대장군" 다른 두개는 여성을 상징하는 "지하여장군"인데 기둥의 상단부는 사람의 형상을 새기고 몸통부분은 앞면을 평평하도록 깎아내고 글씨 쓸 자리를 곱게 다듬는 작업이었다.

   
지역의 유지들도 계속 인사차 찾아오고 술과 안주가 푸짐하니까 축제는 한층 더 흥이 났다. 이윽고 오후 세시 경 장승을 다 만들어 선배 장승들이 여럿 서 있는 자리 가운데에 새 장승을 안치하였다. 네 개의 장승은 동구 밖 네 군데에 각각 세워졌다.

천하대장군의 하단에는 서울 칠십리, 수원, 이천도 각 칠십리라는 이정표가 쓰여 졌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사방의 주요고을에서 칠 십리 거리에 있었던 곳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장승은 흉측 맞게 생긴 것이 아니라 눈을 부릅떴지만 정이 가는 따뜻한 얼굴이었다. 어르신 말씀의 의하면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무수한 장승중에 엄미리 장승이 가장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이 대단하였다.

장승도 미남미녀가 있어 호감과 비 호감으로 구분되는 모양이다. 판소리로 잘 알려져 있는 변강쇠가 추운겨울 장승을 뽑아 땔감으로 쓰다가 전국의 장승들의 원한으로 몹쓸 병에 걸려죽었다는 조상님들의 해학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이윽고 장승 앞에 제물을 높다랗게 진설한 다음 마을의 원로 세분이 헌관을 맡고 이장의 사회로 오늘의 클라이맥스인 장승제가 진행되었다. 초헌례가 끝나자 축문이 낭독되었다. 4백여 년을 내려오는 장승제를 통해 조상님들께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인도해 주시고 모든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참사자들의 헌작이 계속되었고 모인 분들의 인사를 끝으로 장승제는 막을 내렸다. 참석자들의 표정이 큰일을 해낸 사람들처럼 하나같이 진지하면서도 밝아보였다. 달은 물론 2억km떨어진 화성에까지 가는 이 첨단의 세상에 장승을 손으로 만들고 거기에다 행운과 복을 비는 모습이 일면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사백여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아득히 먼 우리의 조상들과 지금을 사는 우리들이 장승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시대를 초월한 하나가되어 서로가 복을 빌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경이로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설픈 종교행사가 아닌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미풍양속이 바로 이런 숨겨져 있는 전통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해 넘어간 후의 산 공기는 쌀쌀했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신선했다. 오늘하루 종일토록 장승과 같이 지냈으니 나에게도 복이 오려나.

저작권자 © 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